연극을 향한 끝없는 대화 그리고 축제 - 연출가 안상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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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향한
끝없는 대화
그리고 축제

연출가 안상철


#1.

사람들 대부분은 메일 주소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
순하게 생겼는데 마초도 있고, 난 그저 호기심쟁이 일 뿐인데 뱃사람이라는 좀 거친 느낌의 주소를 가지고 있다.
오랫동안 불러온 그의 호칭 안 감독은, 안빈이라는 메일 주소를 쓰고 있었다.
물론 영어로 안빈이었기 때문에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安貧-편안한 마음으로 지낸다는 뜻이라고나 할까?
직접 물어보지는 안했지만 安貧樂道, 安貧守分 익히 들었던 말들의 안빈일거라고 생각 했고, 만약 그 뜻이 아니라고 해도 그에게는 잘 어울리는 메일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2.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연극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유난히 얼굴이 맑아지고, 밝아지면서 웃음이 가득 했다.
역시 자기 좋아 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날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행복한 일인 것 같고, 그를 연출가로 이끌었다는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다.
흔히 연극이 배고픈 직업이라고 하는데, 어느 해 여윳돈이 생겨, 딱 그만큼만 문화공간을 운영해 보고 접자는 꿈을 실천했던, 냉정한 문화기획자 이기도 하다.
10월 26일부터 시작되는 전주 비빔밥 축제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어 아주 바빴고, 올해도 특색 있는 전주를 대표하는 아주 멋진 비빔의 문화를 만들어 주길 바란다.




Q 원래 연출 공부하셨어요?

연극이나 영화에 대해서는 꿈이 있었는데, 집안의 장남이고, 종손 이예요.
그래서 집안의 압박 때문에 스스로 포기 했어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디자인을 공부하게 됐는데, 어느 날 대학 연극반에서 무대미술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처음에는 호기심 삼아 무대 제작을 도와주게 됐어요.
그 후에 군대를 마치고, 잠깐 복학 할 때 까지 6개월 정도 시간이 있어서, 서울 동숭로에 있는 문예회관 자료실에 공부를 하러 다니다, 서울 예전에 다니는 친구를 만나게 됐어요.
공연을 준비하다 같이 참여를 하게 됐죠.
처음에는 무대미술 쪽으로 시작을 했는데. 언젠가 부터 연기자 트레이닝을 받고 있고, 스텝으로써 비중 있는 역할을 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그해, 서울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안티고네라는 작품을 올리게 됐습니다.
그러다 간호대 다니던 막내 여동생이, 연극반 회장을 맞게 됐고. 대학연극제를 나가게 됐는데 연출을 좀 맡아 달라고,,, 이게 사실 연극 인생이 시작된 계기예요.
그러면서, 극단 황토가 만들어지고 합류하고, 첫 데뷔작으로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전북 예술회관에서 하게 됐어요, 공연장이 아닌 전시실에서 연극을 해서 독창적이라는 평가도 받고,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연극 인생이 시작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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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 당시 전북 연극계는 어땠어요?

그 시절은 연극의 부흥기였어요.
극단 황토가 생기고, 창작극회가 다시 만들어지면서, 연극계 큰 지주였던 박동화 선생님의 타계 이후, 그 후배들이 잠재적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었고, 극단 황토가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활성화 되면서, 전국 연극제에 출품을 하고, 수상하면서, 전라북도 연극이 전국적으로 수준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어요.
여러 번 상위권 입상을 하면서, 그야말로 대한민국에서 전주가, 연극으로 능력과 인프라가 구축된 도시라는 걸 알리게 된 거죠.


Q 젊은 날에 감독이라는 타이틀로 좀 무겁게 살지 않았나 싶어요?

행운이었지만, 불행이기도 했죠.
실제로 그 당시 만 해도 이 지역에 연극영화과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전공을 한 사람들이 개인적인 소양이나 어떤 관심으로 연극에 뛰어 들고, 그리고 같이 했던 동료들도, 전문적인 공부를 했다 기 보다는 동호회 비슷하게 시작했고, 그래서 독학도 많이 하고, 자수성가를 했다고나 할까요?
지금 이 지역을 이끌고 있는 연극계 중견들이 그 때 다 같이 했던 사람 이예요.
그 당시에는 소극장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전주에 3-4개 소극장도 있고, 그리고 극단도 5-6개 활동하고 있고, 연극인구도 많이 늘어났어요.
질적인 수준은, 단체나 작품별로 전반적으로 높아졌는데, 열정이 좀 약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헝그리 정신이 좀 빠졌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공연장에 가서 보면 세련미 있게 잘해요. 앞으론 끈끈하게 다가오는 열정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Q 시립극단 연출가를 오래 히셨죠?

시립극단이 1990년대쯤부터 상근화가 됐어요. 직업 연극인이 생긴 거죠.
1993년도에 무대감독으로 데뷔를 했어요.
1년 반 정도 무대 감독을 하다가 그 이후로 5년 정도 상임연출가로 일을 했죠.
상임 시립 극단이 주는 의미가 아주 중요해요.
경제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고 활동을 하다보니까 20대 초반에는 연극에 자기 에너지를 투자하다가도, 생계 문제가 현실화 되면, 그 때부터는 연극 이외로 많이 빠져나가는 누수 현상이 있고,
그런데, 시립극단이 적었지만, 매월 급여를 주니까, 그걸 기반으로 해서 중견 연기자가 많이 배출 됐고, 연극계에서는 많은 도움이 됐죠.
그 후로 안티고네부터 시작해서 연극작품은 80여 편, 그와 비슷하게 무대미술을 했고, 연극 외 에도 무용, 오페라도 많이 했죠.
저는 개인적으로 휴머니즘이 살아 있는 따뜻한 작품을 좋아해요.
도시에 살면서 점점 더 각박해져 가고 메말라 가는 이때, 연극을 보러 오신 분들에게 상처받은 마음, 삭막해져 가는 가슴에, 따뜻한 불기와 온기를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Q 한때 예술 공간도 운영 하셨는데요?

연출가에게 꿈은 전용 소극장 이예요.
대부분 대관해서 공연을 하지만, 그러다 보면 일정도 제대로 맞지 않고, 공간의 구조도, 자기가 구상하는 작품을 못할 경우도 있어서, 전용소극장, 전용문화공간을 갖길 소망하는데요,
저는 그동안 몇 개의 소극장을 만들었어요.
전주에 처음으로 황토 예술극장, 창작 소극장도 만들고, 금암동에 디딤 소극장, 평화동에 아트홀 오페라를 마지막으로 만들었어요.
그 당시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제 개인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더 이상 소극장을 생산 할 능력도 없고, 그래서 그 당시 그 아트홀을 만들 때, 그 당시 3천만 원 정도의 여윳돈이 있었는데, 이만큼 소진할 때 까지만 하자고 생각 했죠.
그래서 3년 정도 하고 문을 닫았는데 그때 느낀 것은 전주에서 소극장을 민간이 개인적으로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메세나, 또는 기업이나 관에서 해야 할 일이고, 설립 자체는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곳 에서 하고 순수한 열정을 가진 문화 예술인에게 운영을 맡기고 간섭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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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연극에서 축제 전문가로 바뀌게 된 계기는요?

시립극단을 그만 뒀는데, 풍남제라는 축제를 전에는 시청에서 공무원들이 관 주도로 했는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민간주도로 축제를 하게 된 거예요.
민간 문화인들로 하여금 기획단을 만들어서 축제를 하자 그렇게 된 거죠.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어요.
신선한 프로그램도 많이 만들어 냈고, 창의적이고, 민주주의 축제가 호평을 받아 그때부터 관을 탈피한 축제문화로 전환이 됐고, 2002년 월드컵 개최도시 별로 각각 문화행사를 하는데, 타 지역에서는 대부분 서울에 있는 기획사들에게 수주를 해서 맡겼는데, 전주에서는 풍남제 에서 획인 된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순수민간 예술로서 그 일을 하게 됐어요.
문화축제로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독특하고 잘 치른 행사로 평가를 받았죠.
그러면서 그 이후에 축제 자체가 하나의 문화 장르 로 자리를 잡았죠.
17년 동안 축제 연출을 해오면서, 1년에 한 두 편씩은 연극을 했고, 그러다, 같은 문화 계통이기는 하지만, 전주시에서 위탁하는 전통문화관 관장을 3년 했어요.
그때, 경영자로서 다양한 문화 경험을 하게 됐죠.


Q 현재, 전주 비빔밥 축제 조직위원장을 맡고 계시죠?

10월 26일부터 29일 까지 한국전통문화전당 마당에서 하는데요.
비빔밥 이라는 자체가 지명도는 있는데, 사실 축제하기에는 좀 어려워요.
그래서 음식과 관련된 체험이나 전시 등등..
계속, 고민하면서 만들어내고 있는데, 먹는 쪽에 많은 비중을 두기 때문에, 원하는 조건에 갭이 좀 있어요.
그런 부분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올해도, ‘비벼봐 신나게! 즐겁게 만나게!’ 라는 주제로, ‘33동 우리동네 비빔밥’ ‘ 비빔전설’ ‘세계거리 음식 푸드 존’ 등 다양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Q 여행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할 텐데요?

축제든 연극이든 마찬가지에요.
하루 24시간 고민해서 해결 되는 게 아니고 어느 순간에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필요해요.
그리고 우리나라는 천개가 넘는 축제가 이뤄지고 있는데, 어디를 가도 프로그램 자체는 아주 유사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내는 한계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어떤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렵고, 또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랬 동안 해온 것 보다는 새로운 것에 더 많이 흥미를 느끼고, 새로운 것을 찾는 성향이 있어요.
사실 외국축제에서 제일 크게 부각 되는 것 은 전통성이거든요.
얼마만큼의 이 단순한 행위를 오래 했느냐 이거든요.
그것이 하나의 자부감이 되고, 수레에 토마토를 가득 실고 와서 서로 던지고 맞고 하는 토마토 축제, 내년에, 또 참여하기 위해 준비하고, 축제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는게 전통성인데, 우리나라에선 아직은 보기가 힘들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가능하면 프로그램을 매년 새롭게 하기 보다는 반응이 좋은 것은 유지하고, 지속가능한 것은 매년 이어가면서 이어갈 생각 이예요.


Q 앞으로의 계획은요?

그동안 연극이 좋아 20년은, 연극인으로 살았고, 10년 정도는 축제전문가로 살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20년 전에 한번 올렸던 공연인데,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치명자산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만들었던 작품, ‘님이시여 사랑이시여’ 그분들은 얼마 전 에 바티칸에서 복자로 시복을 받았고, 성인 품위에 오르셨어요.
이 국악뮤지컬을 전주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정착을 시켜서 정말 이분들이 성인이 됐을 때, 저도 카톨릭 신자지만 전주에 성지 순례 오셔서 이 공연을 보고, 그야말로 한국의 문화, 전주의 문화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게 저의 소망이구요.
다시 연극으로 돌아가서, 장수시대에 노인들을 위한, 노인들에 의한, 노인들의, 연극 동호인 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확대시켜 보는 것 도 제가 가지고 꿈입니다. 연극으로 무한도전 한번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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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를 마치고

역시 전라도 사람들은 예술적인 게미가 있다.
연극, 합창, 무용, 판소리 등등 뭐든지 잘 한다,
그런데 문제는 만들어 내는 생산자만 우수 할게 아니라 문화를 향유하는 소비자가 많아야 한다.
이른바 보고, 듣고, 즐기는 귀 명창을 넘은 오감 명창, 예술이라는게 물건만 좋으면 팔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느끼고 소비하는 고급 소비자가 많아야 발전을 하지, 재주 많은 생산자만 많다면 같이 힘든 묘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연극이 활발했던 도시에서 그리고 뛰어난 배우와, 연출가가 있고, 소극장도 몇 개가 있다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일년에 몇 번 이나 연극을 봤던가? 본 적이 있었는가?
온 세계가 뒤숭숭한 이 때, 나부터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문화, 예술, 역사 종교에 좀 깊은 관심을 가져야겠다.
우선은 안 감독이 지휘하는, 10월 26일부터 시작되는, 전주 비빔밥 축제에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져본다.

? 사진 동영상 : 多陽
? : 정하루 방송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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