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매! 징하고 오지게 살았네. 전라도 천년 - 작가 김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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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 징하고 오지게 살았네
전라도
천년

작가 김화성


#1.

고향이 김제 봉남, 모악산 자락이면서 호남평야의 들머리라고 할 수 있죠.
서울 생활을 하다 보면 다 그리워요.
간신히 뭘 했다 전라도말로 포도시, 천천히 가라 하면, 사드락 사드락가라, 사목사목 가라 그 말인데 왜 우리는 쓸 수가 없을까?
내가 너무 눈치를 보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제 가슴에 쌓였든 것 같아요.

중국에서 황사먼지가 날아와서 그게 수 백만년 쌓여서 황토 흙이 되듯이, 이 흙도 가만히 보면 아주 붉은 거 그냥 약간 붉은 거.. 파노라마처럼 있습니다.
바람도 서울 바람은 약간 싸납쟎아요.
그런데 전라도 들판, 김제 들판 이 무렵 바람은 ,꽃 속에 아주 여린 그런 게 있어요.
이런 것들이 ‘전라도 천년’ 글 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2.

학교 다닐 때 대학 신문사에 있었습니다.
너무 심심하고 재미도 없고 유신시대 뭔가 좀 해봐야겠고,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 했죠.
그러다 보니까 뭔가 쓰고 싶은 거에요. 동아일보에서 여행 기자를 했어요.
우리 땅도 모르는데 뭘 아는 것처럼..

헝가리 대 평원을 지나다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땅으로 해가 지는 지평선, 내 고향 김제, 나는 내 고향도 모르면서 뭐 이런 걸 취재 한다고 다니나 그런 걸 많이 느꼈죠.
그래서 그때부터 내 나라, 그리고 걸어서 다녀보자.
1998년부터 시작한 여행작가 한 20년 정도 됐어요.




Q 전라도 천년 언제부터 계획했어요?

그러니까 술이 문제입니다.
어느 날 선배가 저녁을 먹자고 해서, 오랜만에 만났더니 너 뭐 하나 써야겠다. 바쁠 때 써야 글은 좋은거야...
‘전라도 천년’ 처음에는 막막 하쟎아요.
그래서 어떻게 쓸까? 그런데 제가 생각한 전라도가, 다 내 몸에 농축돼 있더라구요.
서울에 와서 느낀, 전라도 사람이여서 받은 서러움.
왜! 나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 난 것도 아닌데..
내 고향, 나의 피를 준 내 고향 김제사람이라, 느낀 서러움 같은 것들이...
나도 모르게 몸에 쌓여 있었고, 막 울컥울꺽 나온 게 이 책 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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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래서 힐링이 많이 됐어요?

부채감이라고나 할까요.
옛날에 우리 동네가 50여 호 정도 살았어요.
고등학교 때 토요일에 가면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논에 계시거든요.
집도 안가고 거기서 교복 벗고, 같이 어머니하고 일을 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 동네가 점점 빈집이 많아지는 거예요.
먹고 살게 없으니까 다 바리바리 사들고 서울로 가서, 공돌이 공순이가 됐어요.

김준태 시인이 썼던 호남선이라는 시를 보면 배운 놈들은 다 가고 기차도 가고 똥개만 남아서 꺼이꺼이 우는구나....
그 시가 항상 생각이 나요.
그리고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고향에서는 땅 팔고 뭐 다 해서 날 보냈지만, 서울 가서 그 급급수 만 당하고 막상 네가 한 게 뭐 있느냐?
그런 부채감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Q 전라도 천년에 대한 소개해 주세요.

올해는 전라도 정도 10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주와 나주의 첫 자를 따서 전라도가 됐어요.
조선팔도 중에서 두 번째로 생긴 이웃 경상도(1314년)보다 무려 296년이나 앞섰죠.
그러면 전라도가 제일 먼저 생긴 것은 이뻐서 그랬느냐? 그런 게 아니거든요.

고려 현종 1018년 고려 8번째 임금 현종 때, 거란이 3차 침입을 헀어요.
그 당시 고려 제정의 3분의 1은 전라도 땅에서 나오는 곡물로 지탱을 하고 있었죠.
그러니 빨리 행정조직이 정비가 돼야, 그쪽에서 나오는 곡식을 개경에 가지고 올 수 있으니까 생긴 거예요.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 해군도 마찬가지, 거의 전라도 살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양에서 높은 인물을 쓸 때는 이 지역 사람 안 쓰거든요.
필요한건 인물이 아니고 곡식이거든요.
그러면 전라도 민초들은 무슨 희망이 있어야 살 거 아닙니까?
양반들은 정자 만들고 자기들끼리 시 짓고 놀기도 하지만.. 민초들은 어떻겠어요?
그 사람들도 희망이 있어야 사니까, 그래서 미륵 사상이 싹 튼 거예요.


Q 미륵 사상이 전라도 천년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군요?

통일신라 이후 고려로 넘어갈 때 미륵사상이 가장 성할 때고, 신라도 그랬고, 고려 궁예도 미륵이었고, 호남도 미륵이었죠.
그런데 그게 좀 달라요. 경주 사람도 미륵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신라는 미륵상생 이죠.
전쟁에서 이겼고 잘 살았으니까 우리와는 다르죠.

그러나 백제나 고려는 미륵부처가 빨리 내려와서 힘들게 사는 우리를 구제해 달라는 거죠.
그래서 금산사 모악산을 중심으로 미륵종교가 활발하죠.
백운동 골짜기, 귀신사 쪽에서 이쪽 용화동, 증산교 등등 다 미륵신앙 이예요.
그곳에 가면 지금도 그 분들은 미륵 부처를 믿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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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걸어 다니면서 취재 한다는게 아주 매력적인데요?

저는 광대지요.
작가보다 기자보다 광대가 좋습니다.
전라도 천년이라는 책을 쓰고 아쉬움이 참 많았어요.
미륵 사상 그리고 모악산이라는 저 산이 엄청난 보물단지거든요.
우리나라 특히 내 고향에 사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대하소설 아니면 뭐라도 엮어야 되는데 그런게 참 아쉬어요.
모악산이라는 제목으로 20권 정도는 나와도 되요.
거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또 걸어 다니면, 정말 전라북도만 해도 그 애기가 엄청나요.

제주도는 완전히 사고체계가 다른 땅입니다.
제주도에는 1만 이천여 신이 있는데. 지금도 그 신의 체계에 살고 있는 제주 사람들을 모르면 제주를 이해 할 수가 없는 거죠.


Q 그러면 전라도 천 동안 이 땅이 좀 발전이 있었나요?

전라도 사람을 위한 행정조직이 아니고, 수탈을 하기 위한 행정조직이기 때문에 전혀 관계가 없죠.
사실 이 책이 ‘전라도 천년’의 깃발 정도면 좋겠고, 앞으로도 써야죠.
사실 아직도 소외된 섬 같은 게 전라도 거든요.

그리고 이 책을 내면서 누가 볼까? 전라도 사람 빼 놓고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전라도 사람 아닌 분들이 찾는 경우가 있는걸 보고, 아 이건 의미가 있다 생각했죠.


Q 그럼 전라도의 힘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의 힘은 주변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주변이었죠. 변방..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전라도는 변방에 우짖는 새다 그런 애기를 많이 해요.
그러나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변방이야 말로 자유롭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어디에 억매이지 않고.. 변방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 빵을 원하지 않아요.

새로운 걸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전 그 상상력 그 역동 생명력이 전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그걸 여기에 썼습니다.
전라도 민초들이 여태까지 천년동안 이어온 것이 전라도의 양반이나 무슨 잘난 사람들 때문이 아니예요.
전라도의 고향을 지킨 굽은 소나무 우리 민초들, 그 분들이 천년을 이어왔고 그 분들의 줄기찬 생명력이 앞으로 새 천년에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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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다시 천년 전주를 기획한다면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고 싶으세요?

전라도 민초들의 생명력, 그걸 사상적으로 풀어 보고 싶어요.
미륵사상 저는 무속의 힘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판소리도 원래 무당들 무당들의 비나리 가 이어져 온 소리가락인데, 저는 그 무속 정화수 떠 놓고 비는 어머니의 마음, 그런 게 사상적으로 정리가 됐음 좋겠어요.
그 힘, 판소리도 상당히 공식화 돼 버리니까 재미가 없어요, 생명력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가끔씩 무당들을 찾아가서 2박 3일쯤 듣습니다.
거기서 느끼는 생명력은 말 할 수가 없어요.

저걸 끄집어 내서 뭔가 해야 하는데...이게 고민이죠.


Q 앞으로도 전라도 사람으로 하실 일이 많으시겠어요.

전주도 한옥마을이 상업화 된 것 까지는 좋지만 변했쟎아요.
전주가 꽃심이란 말도 지금은 아니예요.
변방의 힘은 중심에 대해서 열등감을 안 가져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지만 그 분들이 언제 열등감 가졌어요?
오로지 내 새끼 키워야 하니까 그런 어떤 당당함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주가 가지고 있는 아주 묘한게 있거든요.
그리고 전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제가 알기로 미륵 세상을 꿈꾸면서 모악산에 오는 사람들이 몇 만 명은 될 겁니다.
이론적으로 왜 거기가면 마음이 편한지, 강증산이 왜 거기서 마지막 구리 골 약방을 세우고 죽었지? 정여립이 대동깃발 했던 곳이 오리 알 터 거든요.
이쪽에 터가 있습니다.
역적으로 몰려서 죽으면서 거기에 소금 몇 가마니 붓고 숯을 묻고 연못을 파고, 지금은 밭이 됐지만요.
모악산 자락 금평 저수지가 오리 알 터입니다 올터 미륵부처가 온다는 거죠. 이런 걸 고향 사람도 몰라요.


*** 인터뷰를 마치고

작가는 ‘전라도 천년’에서 전라도의 생명을 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전라도의 탄생’ ‘타오르는 들불’ ‘거시기 머시기 아리랑’에서 전라도의 역사와 인물, 문화 등을 조명하고 있다.
정여립, 전봉준의 의로운 정신, 전라도 토박이의 감칠맛 나눈 깊은 문화.
그리고 또 신재효, 매천 황현등을 통해 선비장신과 예술을 소개한다.
그리고 ‘오백년 한지붕 두 가족’ 전라도와 제주도 두지역의 역사적 관계등 을 풀어낸다.

기자이면서 작가인 그가 베낭에서 꺼내 보여주는 작업 노트는 대단했다.
매일매일 그가 보고 듣고 느낀 생각,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시나 글이 정리된 노트가 40권 정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앞으로 지금 까지 써낸, 길에서 놀고, 전주에서 놀고, 책에 취해 놀았던 책 말고 얼마나 더 많은 재미난 강연과 책이 쏟아질까 기대가 된다.

1년에 한번 씩은 서울 양반들 모시고 내려온다는 모악산투어에 나도 한번 동참해서 그의 “신나게 놀아야 좀 사는 것 같다는” 삶의 솜씨도 좀 배우고, 좋아한다는 막걸리에 도토리묵, 한 사발 대접하면서 해박한 그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어 보고 싶다.


? 사진 동영상 : 多陽
? : 정하루 방송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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