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선생님은 언제부터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197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시대만 해도 서울에서 형이 벌어서 공부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래서 구두를 만들었죠.
야간열차를 타고 와 보니 기숙사를 데리고 가더라구요.
그 다음날 구두공장에 갔죠.
Q 당시는 고급구두 전성시대가 아니었나요?
기술적인 부문에서 아주 좋았죠.
지금은 하루에 보통 혼자서 만들 수 있는게 20-30켤레인데 그 당시에는 내가 사람을 데리고도 잘해야 10개에서 15개, 사람 손이 많이 가면 망치질도 많이 하고 크게 변하지 않게끔 하다 보니까, 그 때 신발이 견고하고 값어치 있는 슈즈를 만들어 낸 거죠.
처음에는 심부름 하면서 본드 칠하고 가죽 자르고 제일 밑바닥부터 시작했어요.
그때 본드 칠 잘못하면 쥐어 막히고 욕도 먹고...
그러면서 배웠어요.
Q 그 다음 단계는 뭘 배웠어요?
79년도니까 초등학교도 안 나온 애들, 중퇴한 애들, 구두 계통이 그 당시에는 중학교만 나와도 학벌이 좋았던 시절 이었어요.
저는 고등학교를 나왔으니까 그래도 배움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나이가 있어서 배우니까 빨랐어요.
다른 사람이 1년을 배울 때 6개월에 다 배우고, 1년에서 1년 반 정도 하니까 이 일을 해서 돈을 벌겠구나 싶어서 엄청나게 노력을 했죠.
그 당시 디자인을 저희들이 다 했어요.
명동에서 뒷골목 한 바퀴 좍 돌면 디자인 보고 똑 같이 만들기도 하고 응용해서 만들기도 하고..
Q 그 다음 단계는요?
일본으로 갔어요.
1988년 올림픽 시작하기 직전에 일본에 가서 6개월 만에 실패하고 돌아 왔던 계기가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와서 보니 사는 건 어렵고, 그래서 1년 반 지나서 돈도 벌어야 하고, 내 기술도 일본에 심어야겠고 해서 다시 일본에 갔죠.
이제 말도 좀 할 줄 알고 거리도 알고, 사람도 알고 하면서, 내가 정말 고급 기술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3-4년 노력했죠.
Q 당시 구두 하면 일본이 앞섰어요?
엘칸토가 일본에 제일 좋은 구두회사하고 자매결연을 했어요.
그 브랜드가 프랑스 브랜드 찰스 조르단.. 그 브랜드에서 근무를 헀고..
그 당시 구두는 일본에서 다 도입을 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는데..
단지 일본 사람들은 정확했고 우리는 좀 생략하고..
그래서 얼마만큼 내 걸로 소화하느냐가 중요했죠.
히꼬미즈 일본 구두전문대학교에서는 유일한 외국인 선생으로 가르쳤죠.
일본에서 구두에 최고의 기술을 배울 수 있습니다.
Q 우리나라 사람들이 솜씨가 좋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들면 세계적인 수준의 구두가 나올까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한국 사람은 많이 만드는 건 잘해요.
단지 정교하고 말 그대로 구두를 빈틈없이 만드는 건 일본사람들이 아주 잘하죠.
특히 남성화는 영국이나 이태리 못지않게 엄청나게 성장을 했어요.
일본 30-40대 들이 만든 구두가 백 몇만원 해요.
그런 게 굉장히 부럽고, 구두 전문대학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Q 구두는 몇 번의 공정이 필요한 거예요?
사람마다 평가하는 게 다 틀리지만, 섬세하게 잘 만드느냐, 싼 신발을 만드느냐에 따라 7-80가지 공정은 돼야 하나의 신발이 완성 되죠.
저의 학생들이 20-30대인데 구두가 이렇게 복잡한 과정이 많은지 몰랐다. 구두가 너무 싸다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현재는 30-40가지 공정이지만, 전 공정은 70-80가지예요.
물론 간단하게 자르면 15개 20개 이렇게도 나눠지지만, 정말 좋은 신발을 만들기 위한 공정은 그 만큼 들어간다 이거죠.
Q 명품 구두가 한국사람 에게 무조건 맞고 좋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겠죠?
체격이 왜소하고 키가 크고 하는 분들은 어느 정도 서양하고 비슷합니다.
대개 아시아 민족들은 서양하고 발 길이나 볼이 틀린데, 유럽에서도 명품의 경우 중국 같은데서 워낙 소비가 많이 되다 보니까 아시아 쪽에 만드는 틀하고 유럽에서 만드는 틀하고 두 가지를 쓴다고 해요.
그런데 그것도 너무 크게 해버리면 신발이 이쁘지가 않고...
명품 구두는 자기네들의 칫수가 또 있어요.
Q 구두 장인으로 언제 희열을 느끼나요?
제대로 나와서 내가 봤을 때 이건 정말 이쁘다. 그때가 제일 기뻐요.
대개 이쁜 신발은 발도 약 70%는 편하다고 봐야 해요.
최고의 구두는 모델들이 신는 하이힐이 아닌가 싶어요.
30-40년 구두를 만들었고, 나름 데로 수백 가지 수천가지를 해 봤고..
지금 젊은이들도 본인이 장인이 되기까지는 노력을 하고 계속 만들어야 경지에 도달하는 거예요.
저도 잘못했을 때 3번을 다시 만들었을 때도 있었어요.
부끄럽다기 보다 많이 배웠어요.
*** 인터뷰를 마치고
제가 목표한 것의 3분의 일은 이룬 것 같은데 3분의 2가 어려워요.
학생들 가르치는 것, 그리고 1층에 매장과, 주문 제작할 수 있는 기술자와 학생들이 쓰는 공간이 있고 2층은 공방과 조그만 카페, 그리고 3층에 집이 있음 좋겠어요.
그리고 구두 전문학교를 세우고 싶고.. 다행이 아들이 내 대를 이어서 걱정이 없어요.
좀 더 나이 들어 아들이 이끌어 갈 정도가 되면 고향 전북 장수에 가서 아들이 주문을 받은 것 만들고 싶어요.
구두 한 켤레 공정이 70-80개 그리고 혼자 한 족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서 10명 미만이라니...
생계를 위해 만든 구두 그러나 이 산골 소년은 처음부터 천직이었다고 말한다.
이왕 이면 고향 장수에 일본의 히꼬미즈 같은 구두전문학교를 만들어 그의 꿈도 이루면서 척박한 전북에 새로운 장인문화의 모델과 전 세계 브랜드와 협약을 맺는 새로운 명소가 되길 기대한다.
? 사진 동영상 : 多陽
? 글 : 정하루 방송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