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본인 소개를 해 주세요.
시와 수필을 쓰고 있고 전주고용센타에서 근무하는 이주리 작가입니다.
어렸을 떄 부터 집안에 시 쓰시는 분, 외삼촌도 시를 쓰셨고 엄마도 시인이셔서 “시” 라는게 굉장히 공허한 언어적 유희인줄 알았는데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제가 뒤늦게 마흔이 넘어서 등단을 하고 나서 알았습니다.
Q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게 됐어요?
제가 어떤 걸 의식하지 못했을 때부터 있었던 내면적인 언어가 43살 44살.. 40대 중반이 돼서 옷을 입고 뛰쳐 나왔다고 해야 맞아요.
그래서 그 때부터 글을 써야겠다라는 생각도 없이 일기장에 차곡차곡 쓰면서 내 보이니까 당선이 됐어요. 신인상 당선도 되고.
글과 문단에 대해서 잘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문학에 대한 공부도 없이 얼떨떨하게 등단이 됐습니다.
Q 그 당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었어요?
저는 38살이 될 때 까지도 돈을 번다는 걸 몰랐어요.
현실을 전혀 모르고 교사를 할 때에도 애기 선생님이라 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도 없었고 그냥 곱기만 했던 것 같아요.
근데 40이 넘어서 아이 둘을 업고 어디 손잡을 데, 발 디딜데도 없이 그냥 8층 건물 난간에 서 있었던 기분이랄까?
그 당시 거의 비명처럼 글이 내면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종의 치유였죠.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글에게 얘기를 했고 글이 저를 받아 줘서 그걸 지금까지 놓지 않고 했던 것 같습니다.
Q 데뷔 작품 이야기를 하죠.
공식적으로는 2006년도에 수필, 2009년도에 시로 등단을 하게 됐어요.
체계적으로 공부를 시에 대해서 했고, 문단에 대해서 이끌어 주고 하는 멘토가 없었어요.
제 시는 형식적이지 않고 기존에 있었던 어떤 시 하고도 이상하게 다르고.. 그래도 독자 들이 좋아 하셨고..
저는 시에 대한 문학적인 지식보다는 진솔하고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작년에 수필집이 나왔어요.
시집은 2009년도에 나왔고, 저는 다작시인이 못 되는 것 같아요.
늘 제한적인 시간에 걸리고 문단에 대해 글에 대한 욕망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게 좀 아쉬운 부분이에요.
앞으로 정년퇴직하고 24시간은 맘 데로 쓸 수 있어서 다작을 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Q 생물 선생님도 하고 독일 유학도 하셨어요?
87년도에 결혼을 하면서,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서 독일을 갔어요.
선생님은 84년 3월부터 87년 2월 28일까지 만 3년정도.
독일을 갈 때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수업시간에 교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다른 분들은 막 웃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노래처럼 들렸어요.
욕심껏 랩 실에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출산을 하고 전업주부로 있다가, 제가 돈을 벌지 않음 안 될 상황들이 있었고, 나이가 40이 넘어서 노동부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Q 정년을 앞두고 요즘 생각이 많으시죠?
정년을 맞으면서 온통 후회라고 할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결핍을 안으로 간직하는 아이로 키웠다는 게 마음이 아프고,
직장생활에서는 나름 데로 승진보다 가치를 민원인들한테 기준이나 가치를 두고 살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지도 않고.
글에 대해서도 욕망 없이 썼다라고 애기를 하지만 실지로는 욕망을 꿈꾸기도 했었던 기억도 있고..
글 잘 쓰시는 분들 보면 부럽기도 하고..
정말 좋은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시 다운 시를 써 본적이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Q 고용센타 현장에서 직업의 가치를 많이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 선배분이 “여러분들은 한 가족을 구원하는 위치에 서 있는 분들입니다.
한 사람에게 취업을 시켜 준다는 것은 한 가정을 구원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시는데 그 말이 마음에 새겨 졌어요.
남원고용센타에 있을 때 실업급여 자격이 되려면 이직확인서를 보내 줘야 하는데, 올망졸망한 아이 셋을 두고 여성 가장이 자진퇴사로 온 거예요.
제가 한달 반을 회사에 쫒아 다니면서 회사 사정으로 실제로 해고를 하고 자진퇴사로 한 걸 증명으로 실업급여를 해 드린 적이 있어요.
식당에서 설거지 하면서 아이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 분이 너무 고맙다고 했었을 때 마음에 느낌이 컸어요.
Q 염두고도의 저자 김용근 선생님도 남원에서 만나셨죠?
선생님을 만나건 저에게 행운입니다.
동편제 판소리에 대한 자료들을 본인 자비로, 발품을 팔아서 그 당시 20년 넘게 가지고 계신 분인데 그 자료들을 가지고 문학화 해 주면 좋겠다고 하셨고 또 문학화 해서 소설로 좀 써 주시면 어떠냐고 하셨어요.
작품을 쓸려면 자료들도 많이 있어야 하는데 따라다니다 보면서 자연적으로 체득이 됐어요.
언젠가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확보가 안 됐어요.
그래서 기행수필처럼 몇 꼭지를 써 놓게 되면 그걸 기본으로 해서 장편이라도 하나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기행수필은 저 나름대로 기록적인 면에서 쓰게 됐는데 미래 시학에 특집으로 나왔습니다.
Q 은퇴이후의 계획은요?
소속이 없어진다는 것 자체가 무한한 자유이면서 무한한 책임이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6개월은 좀 쉬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고 나서는 진지하게 우선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쓰기 전에 많은 것들을 읽고 그 다음에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다른 분들은 몇 십권 저서를 냈는데 저는 시집 2권 수필집 2권 소설 2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쓰기에도 시간이 많지는 않다 라는 생각이 들고,
소설은 한국에서 여인으로 산다는 것, 사회적인 것 이외 여인의 내면적인 것들을 조명해 보고, 문화, 판소리外 지리산권 문화를 사료나 자료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흡수가 되고 전달이 되는 문학으로 추구해 보고 싶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휴머니즘으로 표백된 사색과 응시, 시적 수필로 담아낸 인생철학의 고백성사가 바로 이주리 작가의 작품론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전북문인협회 라병훈 평론가는 말한다.
2021년 6월 정년퇴직하면 24시간은 맘대로 쓸 수 있어서 다작을 해 볼까 생각하고 있다는 이 작가는 인생의 2막2작을 기다리고 있다.
시적 수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듯이 그가 그려내고 싶은 다양한 이야기는 소설과 시와 수필이라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되 천박하지 않고 우리의 귓가에 진실만을 나지막하게 고백하고 속삭임 할 수 있는 진정한 작품이 나오기를 SNS에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친구 5,000명과 함께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