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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한옥마을 '온고을소리청' 主人丈 김일구 명인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8-03 15:38 | 1,876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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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외길 70년
소리, 아쟁·가야금 세 갈래 섭렵
전주한옥마을 '온고을소리청' 主人丈

김일구 명인

#1.

김일구명인은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고,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역사상 판소리명창부와 기악부에서 장원한 사람으로 유일하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고, 공대일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배워 그 기초를 닦았고, 1962년에 장월중선에게서 아쟁산조, 1968년에 원옥화 선생에게 가야금 산조를 이수하였다.

1980년에 박봉술 명창으로부터 적벽가와 수궁가를 전수받아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전히 이수하였고 판소리, 아쟁, 가야금 모두 일가를 이루었고, 1983년에 전주대사습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85년에는 신라문화제 기악부문에서 특상과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2.

김일구 명인은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적벽가〉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었다.
그가 부르는 〈적벽가〉는 송흥록(宋興祿)-송광록(宋光祿)-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 1865-1939)-박봉술로 이어지는 바디이다.

전통 판소리를 기반으로 한 창작에도 관심이 많아, 신재효(申在孝, 1812-1884)의 〈광대가(廣大歌)〉 사설에 곡을 붙여 창작 단가로 부르고, 〈심청가〉를 바탕으로 〈뺑파전〉을 구성하는 등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지금은 부인 김영자명창과 함께 전북 전주시 풍남동에 국악전수관인 온고을 소리청을 개관해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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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향이 화순인데 전주에서 사시는 건 어떠세요?

여기는 서편제 소리 고장이고, 여기 예술을 하시는 분들하고 친분이 있어 형 동생도 하고, 오빠 동생도 하고 하지만 여기 와서 뿌리 박고 살기는 상당히 껄그럽다고 할까?

처음에는 좀 고생을 했습니다.

지금은 같은 예술을 하니까 판소리 악기니까 나이 먹고 하니까 화합해서 서로 좋은 일 있음 찾아주고 안부도 묻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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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떻게 소리를 하시게 됐어요?

7살 때 처음 소리를 시작했어요.
제 나이가 80이 넘었으니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인데 저희 이웃에 또랑 광대인 유일로 선생님이 계셨는데 같은 또래 소리 배우는 아이들은 어르신들에게 용돈도 타다가 과자도 사먹고 게다가 우리 아버님이 소리를 하셔서 춘향전 기초를 배우고 유일로 선생께 가서 다른 소리를 배웠어요.

어린 시절 목이 좋으니까 화순에서 이름이 났어요.
북도 치고, 용돈도 얻고 그 재미를 부쳐서 한 것이 여기까지 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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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본격적인 소리꾼의 시작은 언제부터 였나요?

20살이 될 당시 바탕 소리 긴 완창을 할 수 있는 소리 하는 사람을 알아주더라구요.

나도 좋은 선생님을 찾아가서 판소리 완창을 배워야 겠다 실력을 쌓아야 겠다, 그래서 목포를 올라갔죠.
목포의 장월중선 선생님께, 그 분은 박동실선생님 제자거든요.

그 당시는 여성국극단 유명했는데 여기에 반주자가 없어요.
부산에 갔는데 부산 최고의 명인 원옥화선생이 계세요.

가야금 판소리 무용도 하시고 대단한 분인데 그 분이 초대를 했어요.
여기까지 왔으니까 흥을 한번 돋아보자 하시면서 강태홍류 가야금을 하시는 거예요.

이 단체 그만두고 이 선생님께 가야금을 배워야 겠구나 싶어 강태홍류를 배워 가지고 바로 서울로 올라갔죠.


Q 서울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그 당시 적벽가로 무형문화제 이신 박봉술 선생께 가서 적벽가를 배우기 시작했죠.

선생님이 장위동에서 사셨는데 자전거를 하나 사가지고 20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녀요.
아침 일찍 마스크를 쓰고 털모자를 쓰고 선생님 댁에 가면 김에 고드름이 얼어가지고 덜렁거려요.
그렇게 피 나게 노력을 했어요.

아쟁은 윤윤석 선생, 부산의 박대성 선생 웃대의 선생님들은 돌아가시고 안 계시니까 3인이 경쟁이 되는거예요.

박대성 선생님은 부산으로 가시고, 내가 올라가자 윤윤석 선생님은 돌아가시고 아쟁 하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 아쟁은 김일구다 이렇게 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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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983년 전주 대사습에서 판소리 장원을 하셨죠?

모든 사람들이 그 정도 실력이면 전주대사습에 한번 나가 봐라 그러는데 대회를 나가려면 누가 물 한잔이라도 떠 줄 수 있는 보조자가 있고, 누가 짚어줘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나 혼자예요.

3번을 나왔지요.
판소리도 3번 악기도 3번 2등을 두 번씩 하고 마지막에 장원을 해서 대통령 상을 받았는데 2등을 2번 하니까 수입을 괜챤더라고...

뭐든지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되는구나 파야 되요 노력을 해야 되요.
노력을 해야 그 댓가를 쟁취 할 수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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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김영자 명창과 부부명창으로 사니까 어떠세요?

편하지가 않아요.
서로 공부를 할 때는 집사람이 박자를 쳐주고 집 사람이 공부 할 때는 내가 쳐 주는데 남자 여자가 가지고 가는 목의 길이 달라요.

부부간에도 경쟁이 있어요.

둘이 소리를 하니까 참 좋은 면이고 불편한 건 내가 남자라고 어디 초청을 해서 공연을 가면 이 사람이 다 챙겨야 하잖아요.

챙겨가지고 가면 갓, 망건, 옷, 도포 등등 열 가지 꼭 가면 한 가지가 빠져 그것 가지고 싸우고.

공연 끝나면 풀고 그런 재미로 살고 있어요.


Q 전주에 터를 잡게 된 계기는요?

김영자 명창이 국립 창극단에 있을 때 주인공을 하면서 지도위원을 했어요.
저는 국립 국악원에도 있었고 정년을 앞두고 고민을 했죠.
우리가 서울에서만 살게 아니라 타 지방에 가서 한번 터를 잡아보자, 우리 부부의 세계를 한번 만들어 보자 늘 손을 잡고 고민을 했죠.

예술도 경쟁 상대가 있어야 발전을 해요.

내 소리를 듣고 칭찬 해줄 사람이 없어요.
고민 끝에 전주는 교육도시이고 판소리 고장이고 선, 후배도 많이 계시니까 우리가 전주에 터를 잡고 살면 어떨까 하다 정년을 하고 전주로 가자해서 온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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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국악계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근본이 뭣인가를 깨달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옛말에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 그런 식으로 살지 말고
그 전에 생길 때 주웠던 것을 챙겨서 넣어 놨다 나중에 이걸 꺼내서 풀어 먹을 수 있는
밑천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전통음악 사실은 됩니다.
광대가 에도 그런 소리가 있지만 오장에서 끌어내는 소리가 우리 판소리입니다.

오장에서 끌어내서 발성을 해야 저것이 과연 전통 판소리다 근본이 있는 소리라고 평가를 받거든요.


Q 전주가 국악의 본 고장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전통이 줄고 신식음악만 생기고 하니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한옥마을 조성 할 떄 쓰러져 가는 집들 다 뜯고 새로 집을 지을 때 그때는 오목대에 둘레 길도 없었어요.

전주는 예술의 도시이고 관광도시 인데 뭔가 볼거리가 있어야 하고 보고 가서 마음에 남는 것이 있어야 전주를 또 찾아주지 누가 찾아 주겠나?
부채 체험관 등등이 생길 때 거기다 우리 5바탕의 체험관을 만들어서 적벽가 수궁가 등등...
5바탕의 명소를 만들면 한옥마을의 관광 산업이 더 발전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주 김승수 시장께 부탁드립니다.

한옥마을에 적벽가집 심청가집 등등 판소리 5바탕 한 채씩 지어서 예술인 촌을 만들면 전주가 소리의 고장을 알리고 전주의 더 볼거리가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김일구 명인은 전주 소리청에 좋은 에술인 들이 많은데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더 알아주는 세태가 많이 아쉽다고 하셨다.

그리고 퓨전 음악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고
예술은 다 변하지만 변하는 중에도 챙길 것은 딱 가지고 있어야 하고
절대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생각은 아예 가지고 있지 말라고도 하셨다.

김일구 명인은 성음이 분명하고 상청과 하청에 능하고
남성 판소리 특유의 호방한 기개와 지극한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면서도
미려한 성음으로 판소리의 세세한 부분까지 묘미있게 표현해 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일구 명인이 이룬 오늘날의 소리와 실력은 타고난 재능도 있겠지만 시대의 변화에 모든 걸 버리고 언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하고 끝장을 보는 선천적인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80이 넘었지만 이 시대 배우고 도전하게 있음 새로운 선생과 길을 찾아서 또 한번 최고의 명인이 되고 싶은, 조용하지만 뜨거운 열정이 있는 우리가 이 시대 본 받아야 할 신인류 Z세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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