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김두경서예가 문자향 서예문화연구소장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10 09:43 | 1,231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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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글씨, 읽는 그림 character to see, picture to read
-문자추상 · 楷書서체 삼각점에서 시작 character's abstractionstarted from the triangles of the Haeseotypeface
이 시대의 서예란? What is the calligraphy in this era?

김두경 문자향 서예문화연구소장

#1.

자신을 잘 다스리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사람이 선비이고, 선비의 삶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서예이다.
그래서 서예를 선비 문화의 꽃이라고 하나 보다.     
외증조할아버지가 조선말에서 일제시대까지 한학자로 이름을 높였던 송유재선생, 형제에게 한문과 서예를 가르친 부친 김형운선생께서는 가난해도 글을 배워야한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가풍은 형 김병기, 아우 김두경 서예가를 이 땅에 이름을 새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2.

아하(我河) 김두경 서예가는 “상형 한글체를 완성한 뒤 서예로 표현하지 못할 문자는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대한민국이 세계 정신 개벽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확신아래, 이는 곧 우리의 선비정신이 될 것이고 노벨상보다 더 큰 '세계선비상‘을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한다.”

“서예는 속과 겉이 다를 수가 없고, 작가의 삶과 유리되는 순간 더 이상 서예가 아니며, 글씨가 속 스럽게 변해 버린다.” 면서 “서예는 반이 수행”이라고 강조한다.




Q 본인 소개를 해 주세요.

26살에 서예에 인생을 걸었고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해 왔지만,

오로지 서예로, 한글서예로 세계무대로 나아가야 하고,
서예로 무엇이든지 다 표현할 수 있는 본질적인 서예에 경지라고 할까?
서예의 절대 경지가 뭔지를 추구하고 있는 서예가라고 말 하고 싶습니다.

31살 때부터 서예는 그냥 배우는 것이 아니고 뭔가 깨달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이는 절대 경지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 느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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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첫 번째 개인전을 아주 젊은 나이에 하셨어요?

35살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는데 그 당시 제가 서예의 절대 경지에 어느 한 가닥을 막 깨쳤어요.
이건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그 당시 나를 알았다는 것, 선생님한테 인가를 받았지만
사회적 분위기로 그 젊은 나이에 개인전을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서예계 상황에서는 미친 짓 이었지만
그래도 이것은 뭔가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야 했습니다.

내 창작물과 전서, 해서 등등 다 섭렵을 했지만 내 서체를 만들어낼 수 있던 때가 바로 그 당시였고, 이건 내 얼굴이야 라고 말 할 수 있어서 개인전을 했습니다.


Q 그 당시 어떤 작품을 선보이셨고 반응은 어땠어요?

그 당시는 한자가 주로였고, 갑골문이라든지, 청동기 시대 문자와, 상형화된 그림과 같은 글씨가 있어서

하기는 좋았죠.
그런데 제가 거기에 어떤 사전에 나오는 모습이 아닌, 내 마음속에서 재구성을 하고, 문자의 원리를 알고 재구성을 하고, 내 느낌, 쓸 때의 감정 등등, 내가 뭘 표현할 것 인가를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표현을 하려고 했다는 점이 다른 서예가하고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서예냐? 어른 들 일수록 너 그렇게 가면 안 돼 이게 무슨 서예야?
과연 과거에서 해오던 그대로 답습을 하고 외형이 비슷한 것을 서예라고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죠. 

저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고, 나는 이 시대의 서예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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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하석(何石) 박원규 선생님이 스승이시죠?

何石 선생님한테 처음 가니까 제가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식도 필요하고 폭 넒은 공부가 일단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운필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한 말씀도 안하세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갖다 보여 드리는 건 만 하는 거예요.

그럼 “괜챦아, 좋아. 그대로 가” 이 말씀만 하시죠.
근데 저는 선생님한테도 배웠지만 의정부의 송용근선생은 하석선생님 제자인데 우리 한참 선배이죠.
그 분이 글씨 쓴걸 보면서 와... 저게 뭐지?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법칙이 있고, 붓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는데 나는 그걸 모르겠어요.
그 분한테 ‘장맹용비’라는 해서 서체가 있는데, 해서 서체 삼각 점 찍는 것을 보는 순간 느낌이 왔죠.

아 저거구나! 그 화두가 하나 딱 풀리니까 실타래 풀리듯이 풀렸고, 그렇다고 해서 서예가 되는 건 아니고 나의 잘못된 습관, 미적 관점, 수없이 다시 점수(漸修)를 해야 하지만 그 때 그 원리는 처음 안거죠.


Q ‘붓이 섰다’ 선생님께 인정을 받은 날을 기억하시죠?

해서에서 예서로, 예서에서 행서로, 이렇게 확장을 해서 내가 이 원리를 다 적용할 수 있을 때 이제는 선생님께 인정을 받고 싶었어요.

부안 월명암에서 선생님 모시고 내 동료들 오시게 하고 글씨 쓰기 판을 벌렸어요.
저녁에 글씨를 쓰는데 선생님께서 내가 붓을 들고 쓰자마자
“애 중하 (仲河) 붓 섰다, 중하 붓 섰다”
그 말은 정말 제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15명 동료들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얼마나 알아 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애 붓 섰다” 인정을 받았을 때 그 기분....
글씨는 생명력이 있냐 없냐예요.
인형하고 사람하고 차이인거죠.
일단은 못 생고, 어리석지만 생명체 하나는 만들어 논거죠..
애기를 낳았다고 해도 그 생명이 제 역할을 하는 건 아니거든요.
공들여서 키우는 과정, 그런데 내가 난 자식은 다 이쁘고, 단점도 안 보여요.
근데 선생님 앞에 가면 보여요.
그게 묘한거죠.

저는 선생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났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희 선생님은 저와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있는 분이세요.


Q 선생님 글씨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다고 생각 하세요?

작가는 마무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변화해 가는 거죠.
이제 꽃을 막 피워내는 봄이라고 할까?

세계 서예비엔날레에서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글이라는 컨텐츠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글이 그 때 당시만 해도 궁체 위주였고, 그래픽이다, 기능이다, 예술이 아닌 것 같다라는 얘기도 했고, 그래서 한글을 새롭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또 서예가 대중들에게 잊혀진 삶의 문화가 아니라 대중 속으로 좀 들어가야한다는 대 전제아래 한글 문화상품으로 생각했죠.

한글이 생각보다 엄청 어려워요.
단순하니까 동그라미 세로긋기 가로긋기 밖에 없으니까..
너무 어려웠고, 3년 계획했는데 10년 걸렸어요.

상형 한글이라는 서체를 만들고 지금과 같이 문자 추상을 자유롭게 가는데 10년 이상 걸려서 이루어 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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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도 글씨에 대한 부담과 고민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고민스럽지는 않아요.
대중과 어떻게 할까? 고민이지요.

지금은 어떤 문자, 선만 가지고도 내 느낌을 전달 할 수 있고 창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고민스럽지는 않은데
어떻게 하면 대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서예라는 것을 알게 하고,
문장을 쓰기 위함이 아닌, 독립된, 아주 독특한 예술로 어떻게 하면 서양 사람들에 인식시킬까?

그래서 좋은 글씨가 과연 뭘까?를 고민하죠.
지금도 추사 추사 하지만 추사의 진짜 장점을 안다면 이 시대의 작가들이 추사를 능가하는 그것이 분명 있어야 맞고, 알아 차려야 하는데...
선생님하고 그 대화를 많이 해요.


Q 대중하고 만남을 아주 소중히 생각하시는데요?

작가는 잠재적으로 연예인이라고 생각을 해요.
인기를 먹고 사는 거고, 공감을 해 줄 때 내가 더 신이 나서 더 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도 있어요.

서예가 문화산업으로서 대중들에게 밥이 될 수 있고, 우리나라가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될수 있고, 많은 문화산업이 일어날 수 있는데 왜 내 말을 안들어 줄까?
누군가 제걸 받아서 사업을 한다면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주고 할 용의가 있죠.



Q 선비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와 앞으로 할 일은?

앞으로 우리가 위대한 나라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죠.
내 나름대로 책을 보면서 예측이 가능한 세상이 있잖아요?
저는 탄허 스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한창기 선생님 등등 그 분들의 책을 많이 봤기 때문에 세상의 흐름이 어떻게 갈 것이다라는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살았죠.
내가 할 일은 선비정신을 딸각발이 정도가 아닌 21세기는 홍익정신으로 살아야 되고
지금 젊은이들에게 이 선비 정신을 가르켜야 하고
선비정신이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 모든 솔루션이 될 수 있게 내가 준비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했죠.

선비문화교육체험관은 집사람이 운영을 잘 해줘 주고, 선비 음식을 연구하고, 연간 코로나 이전에 15000명 정도 다녀가는 사업으로도 괜찮은 곳이 됐어요.


*** 인터뷰를 마치고

이어령 전 장관은 “한글의 기능성을 찬미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조형적 예술성에 대해서는 새로운 발굴 작업이 없었다”며 “김두경 작가는 서예의 한계를 벗어나 파격적 회화 기법을 도입해 한글의 상징 및 조형성을 재창조했다.”고 가치를 부여했다.

그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상형한글에 몰두했고, 서체도 완성해 디자인 등록까지 마쳤다.

지금도 상형한글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컴퓨터와 결합해 온라인 서예를 연구와, 글자에 사물이나 형상, 자개를 씌우는 것도 같은 일환이다.

한글의 조형미를 살린 ‘상형한글체’의 창시자, 선비정신이 충만한 서예가, 한글의 영역를 넓혀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는 김두경 서예가에게서 그 가 예전에 썼던 시 ‘순수’를 느낀다.




순수

   

- 김두경 -

 

색도 형체도 없이,
구하지도 두려워 하지도 않은 채로,
그저 지금 이순간을 자연과 함께,,
더불어 끊임없이 흘러,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그때

 


사진 동영상__유기승
글__정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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