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박은용, 항일독립운동가 후손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3-03 09:49 | 1,058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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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용, 항일독립운동가 후손 朴殷容, 抗日?立活?人士的后裔
보상금으로 장학사업을... ??金?目作?????...
전북 레슬링의 산 역사 全北??的?活?史

박도성 독립유공자 후손

#1.

"역사를 잊은 민족의 미래는 없다"
No future for people that has forgotten history
忘??史的民族?有未?

朴殷容 항일독립운동가 · 애국지사 이명은 박위용(朴爲容).

1907년 전남 장성에서 기삼연 의병장의 부대에 종군,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는 유림의 파리장서에 서명, 그해 5월에는 국민대회 취지서 선포문, 전라남북도(全裸南北道) 의무금요구특파위원임명장(義務金要求特派委員任命狀)을 수교받았다.

그 후 순천, 곡성, 구례, 보성, 남원 등지에서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후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192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2.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은용 애국지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년 전부터 받기 시작한 국가 보상금을, 박도성 독립 유공자 후손은 유학자였던 할아버님의 뜻을 기리고자, 대한민국 미래를 이끌 청소년 장학사업에 환원하고 있다.
이 대물림의 나라사랑이야말로 이 시대에 더 많이 필요하고, 귀한 때가 아닌가 싶다.




Q 독립 유공자 후손으로 3,1절을 맞는 소감은요?

독립을 위해서 싸우신 분들의 희생정신이 많이 생각이 나고,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할아버님의 희생정신으로 가족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그건 성인이 다 돼서야 좀 알았고, 막연하게 할아버님이 독립만세 불렀다 라고만 생각을 했죠.

정부에서 항일 독립투사 분들에게 서훈을 준다고 해서 아버님이 그때부터 자료를 찾기 시작했죠.
할아버님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독립자금 모집책 호남지역 책임자로서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셨어요.

1919년 7월에 발각이 돼서 옥고를 치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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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렇게 훌륭하신 할아버님 이야기를 후손에게 안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그때는 시대적인 상황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어요.

좌파 우파가 있었고, 할아버님이 해방이 돼서 전주에 잠간 계셨는데 이승만정부에서 농림부장관을 하시라고 했는데 일체 다 거절을 하셨어요.

파리강화회의에 유림 137명 호남의 대표로써 서명하셨고, 그 당시에 3,1운동 하신 분 들은 기독교 불교 천주교 쪽이었고 유림에서는 한 분도 참석을 안 했어요.
그 당시 유교 사상은 머리를 잘라야 하는 등등 이런 저런 이유가 있어 참여를 안 하셨고 대신 독립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거죠.

유학자들도 똑 같이 독립에 열망을 같이 가지고 있었지만 삭발 할 수는 없다 등등 그런 취지에서 3,1운동에 참여를 안 하신 것 같습니다.


Q 할아버님의 유적도 곳곳에 남아 있다구요?/p>

할아버님 유적이 전주 풍남문에도 현각이 있었다는데 가서 찾아보니까 없어졌어요.
남원 광한루 에 딱 한 점이 남아 있는데 7언 율시라고 해서 그 당시에 현각을 쓸 수 있는 분들은 높으신 분이라고 할까?
남원 광한루가 호남 지역에서는 제일 큰 누각인데 시를 보니까 나라를 생각하면서 독립에 대한 시를 썼고 그 시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몇 점 남아 있다고 들었고, 풍남문에 한 점 원래, 남원에 두 점이 있다고 하는데 한 점 밖에 못 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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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할아버님 기록을 찾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나요?

독립 자금 상해 임시정부 모집책이 발각이 돼서 3년 동안 옥고를 치르신 후에도 의병활동을 계속 하셨는데 그 분들은 주로 가명을 쓰신데요.
할아버님이 9년을 옥살이를 하셨어요.
12년을 받았는데 총 옥살이는 9년을 하셨습니다.

자료 하나는 군 자금 모금 책으로 3년을 언도 받고 살은 기록입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광주고등법원, 대구, 부산까지 가셨는데 대구에서 찾으셨어요.
둘째 형님이 그 자료를 찾으러 다니셨는데 옥고 치른 것 3년 짜리만 찾은 거죠.

1977년도에 박정희 대통령 때 표창을 받았고, 1987년도에 다시 서훈을 올려 주셔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는데 그 당시는 어떤 물질적인 보상은 훈장만 주셨어요.


Q 국가에서 주는 보상금을 장학금으로 쓰시쟎아요.

2년 전에 국가에서 3대 째 되는 분 중에 한명을 선정 하는데 제가 받게 됐어요.
할아버님이 유학자로써 또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큰 획을 이루신 분이셔서,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청소년들을 위해서 장학기금으로 내놔야 겠다는 생각으로 바로 시작을 했죠.
그 해부터 바로...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할 계획입니다.
할아버님이 독립운동으로 가족들 돌볼 시간적인 물질적인 여유가 없어서 고생은 했지만 저희 아버님은 가족들을 대학까지 공부를 가르켰어요.

고종황제때 할아버님이 의로운 장군이라고 칭찬도 받으셨다는데 일제 압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기록은 다 없어졌어요.


Q 할아버지가 주로 활약하신 무대는 어디였나요?

영호남 지역 유림 대표셨는데 역사학자들은 경제적인 지원을 하신 분들이 좀 더 높게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런 분 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해요.

그에 따른 판결문이 나와야 하는데...
판결문 이름은 다 가명을 쓰기 때문에 못 찾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어떤 혜택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지도 않았고...
독립운동을 후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하신 건 아니잖아요.

오직 나라를 위해서 그 분들은 희생을 하셨어요.
국가에서 늦게나마 물질적으로 보상을 하지만, 아직도 못 받는 분들이 더 많다고 생각을 해요.
앞으로도 판결문은 직접 법원에 가서 다 들춰봐야 해요.
당시 저희 아버님도 그러셨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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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레슬링 운동은 어떻게 하시게 됐어요?

대학을 가기 위해서 특기자가 돼야 했고, 그 당시 이 운동이 가장 저변 확대가 안 됐고..
레슬링을 시작해서 6개월 만 에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했고 특기자 혜택을 받아서 대학을 들어가게 됐죠.

졸업과 동시에 지도자 생활을 했어요.
전주동중학교도 레슬링 창단을 했고 전라고등학교도 창단했고 전주시청팀을 맡다가, 전주제지 (현 한솔제지)에서 실업팀을 스카웃해서 팀을 이적 시켜서 감독을 하기 시작했죠.
20년 가까이..


Q 프로레슬링과 올림픽 레슬링의 차이는요?

올림픽 레슬링은 꺾고 조르고 하는 것만 없어요.
타격이 들어가면 프로 레슬링이고..

타격이나 조르기 꺾기가 빠지면 올림픽 레슬링이 되는 거죠.
그 당시 우리나라에 삼성, 주택공사, 지방에서는 우리가 있었죠.

성적도 많이 내고, 88올림픽에 제자들이 출전해서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올림픽 대표선수도 만들고 아시안 게임 금메달도 여러 게 땄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조그만 클럽을 만들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싶어요.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바로 시작을 해보려고 해요.



Q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가족 모두에게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 아들들에게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확실히 이야기를 해줬어요.
남을 생각하고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심어주고 있어요.

그런 할아버님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할아버님이 유학자신데 나중에 개종을 해서 기독교인이 되셨어요.
그래서 믿음 생활을 하라고 항상 강조를 하거든요 교회에 충성도 하고,
앞으로 저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계속 지원을 하려고 합니다.

원래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그림을 그려서 전국대회 나가서 입상도 했는데 요즘 은퇴하고 나서는 시간이 남으면 조그만 작품들을 만들어서 선물을 해요.

남에게 뭔가를 줄 떄 마음이 흐믓하고..
주는 삶이 제일 기뻐요.


*** 인터뷰를 마치고

身體髮膚受之父母
상투를 자르지 못해 3,1운동에 직접 가담을 못하셨다는 유학자 박은용 항일독립운동가께서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다.

후손인 박도성 선생은
앞으로 신앙을 밑거름으로 하는 장학재단을 만들고 레슬링 전용 체육센터를 통해 지(智)덕(德)용(勇)의 후학을 길러서 나누고 주는 삶을 실천하고 싶다고 하셨다.

뒤늦게 신학을 공부한 아내 전주 ‘함께 걸어 좋은 교회’ 이화영 목사를 할아버님께서는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실 것이고, 훌륭한 법조인을 꿈꾸는 큰 아들은 전국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귀한 자료를 더 많이 찾아내서, 할아버님의 큰 뜻을 더 빛내 거라는 기대를 이 새봄에 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의 미래는 없다"
No future for people that has forgotten history
忘??史的民族?有未?


사진 동영상__유기승
글__정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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