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춤추는 바람꽃 전북무형문화재 유지화 명인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9-08 10:28 | 1,046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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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상쇠 영감님
-our leader of theNongakband
-我?????的??

예인 인생 70년
-70 years of artist life
- 70年的??家生涯

춤추는 바람꽃
-dancing wind flower
- 舞?的?花

유지화 명인
전북무형문화재 제7-2호

#1.

호남우도농악은 전라도 서남부 지역에 전승되었으며 그 가운데 정읍이 발상지이자 중심지역으로 평가 받고 있다.

쇠잽이의 부포상모 놀음이 일품이고 세습무 집단의 뛰어난 예능과 조합돼 높은 예술적 수준을 보여주는 정읍우도농악은 여러 지역의 농악을 포용한 농악으로 전국의 농악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암울했던 시대적인 상황에 부딪혀 쇠퇴하며 그 명맥이 끊길 뻔한 호남우도농악의 명맥을 잇고 보존하게 된 것은 유지화 명인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

전북 무형문화재 제7-2호인 유지화 명인은 1943년 전주에서 태어나 소리를 배우는 것을 반대했던 부모님들의 반대로 한 때 포기 했지만 농악소리의 매력에 이끌려 농악을 배우기로 한다.이명식 선생에게 장구를, 박남식 선생과 박성근 선생에게는 꽹과리를 배우며 정읍우도농악의 가락을 전수 받았다.

이때부터 호남우도농악에 심취한 유 씨는 정읍우도농악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70 여년을 정읍우도농악에 한결같이 매달렸다.
그 동안 전북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새마을농악단을 만들어 활발한 활동을 하며 우도농악의 명맥을 유지하고 명예를 회복하는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Q 본인 소개 좀 해주세요.

16살 때부터 농악을 하면서 엄청난 고생도 많이 했고..
좋기도 하고..
내가 왜 이걸 했는지..
안 했으면 참 좋았을 거예요.

아들 딸 낳고 집에서 살림하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것 가지고 살아 봤으면..
그걸 못 했거든.
농악만 가지고 살은 거지. 지금까지...

근데 제 나이에 활동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좋아하고 그것에 보람을 느끼고..
이제는 정말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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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처음 농악은 어떻게 하시게 됐어요.

시내 나가니까 농악을 모집을 하더라고..
그때는 풍장이라고 했지.
여성들을 모집해서 가게 된 거지.

처음에는 제가 소리를 했어요.
농악은 사람이 많아야 하잖아요.
사람이 많으니까 피곤해 힘들고..
사람 가지고 뭐 한다는 것은 너무 힘들거든요.

처음 소리 배울 떄 학교 안가고 거기로 간거야.
그래서 공부도 못 했잖아요.
한 달 동안을 소리를 배웠어요.
선생님이 참 나보고 천재라고 하더라고.
목이 그렇게 좋대, 소리목.
어머니에게 매를 그렇게 맞았지.

고향은 전주 내 탯자리가 노송동이여 북 중학교 옆에.


Q 농악 공부 시작 할 때부터 어려움이 많았겠군요?

송광사 절로 합숙을 들어간 거예요.
거기로 도망 갔지.
어머니가 옷도 다 뺏어버리고 없어.
나갈 수가 없으니까.

우리 어머니가 겁나게 키가 크거든요?
그걸 입고 도망 간거지.

소리는 끝내고 농악을 배운 거죠.
나는 소고가 그렇게 좋았어요.
소고춤을 추려고 하니까 선생님이 못 하게 하더라고.
꽹과리를 하라고 내가 소질이 있었데요.
그래서 꽹과리를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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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 당시 여성농악단이 많았나요?

처음에는 없었어요.
우리가 전북여성농악단을 만든거죠.

봄부터 여름 내내 모집을 한거죠.
모아서 송광사 절로 들어 가는거지.

나는 다 배운거예요.
장구, 꽹과리, 소고, 유명한 선생님들한테 배웠어요.

첫째는 가락이 익어야 되요.
가락이 좋고 잘 쳐야 통솔을 하는거지 못 치는데 어떻게 통솔하겠어요?
키가 적으니까 뒤에서 따라 다니면서 리더를 해줘 뒤에서도..

선생님들이 내가 아까운거야.
그러니까 맨날 꽹과리 하라고 하지 다른 것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한 가지도 안 됐어.

16살 때부터 공연을 다닌 것 같아요.
안 댕기데 없이 다 다녔지 방방곡곡에 전국을 다 다녔죠.
짐은 트럭으로 가고 우리는 기차 타고 가고..
때로는 8톤이나 되는 차에다 짐을 다 싣고 너무 멀고 못가는 곳은 그 속에다 방을 만들어.
12톤 트럭에다 밑에다 3단요 깔고..
오히려 그게 더 편해..
기차 타고 갈아타고 가느니 바로 가서 내리니까.


Q 그때 배운 가락이 우도 농악입니까?

그렇죠. 가락은 변함이 없죠.

선생님들보다 우리가 더 멋있어.
다들 남자들이니까 멋이라는게 없지..
우리는 몸에서 나오는거지.

선생님들이 다 가르켜 준거지.
원 가락만 치면.. 그 상태로만 치면 재미가 없어..
가락도 들어가고.. 멋도 내고 그러니까 더 좋아지는거지.

우리 것이라 특별히 좋다는 것은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우리 것이 어렵고 좋다는 걸 사람들이 다 아니까 자부심이 있는거지. 어깨에 힘도 주고..

정읍은 옛날에 차천재라는 분이 굉장히 유명했데요.
그 분이 농악을 했어.
그래서 전국에서 다 왔어 정읍으로..
그래서 여기를 발상지라고 하는 거야.

호남우도농악 발상지로 유명해 정읍이 우도 농악은 우리 쇳가락이 어렵고 힘들어..
공연을 제대로 다 한다면 농악만 치는데도 1시간이 걸려요.


Q 처음 배울 때 어떤 식으로 배우셨어요?

쇠는 쇠대로 선생님들이 3분이 오셔 쇠, 소고, 장구, 각자 선생님들이 우리들을 가르쳤지.

오후 쯤 되면 판 굿을 펴요.
선생님들이 앞에서 하나 씩 서서.
그런데 요즘에는 본인들이 쇠치고 장구치고 다 해버려 소고춤도 하고.
그러니까 장단이 맞지를 않아.
나 도저히 이해가 안가.
악보를 놓고 한다면 그것 밖에 못가르쳐..
그리고 되지를 않어.

가락이 하나라도 들어가는 게 좋지.
다당다당 당그당이 들어가야지 당그당.
그래야 맛이나.

악보만 본다면 당그당이 안돼.
전부 요즘에 악보로 재미지고 기름진 게 없잖아.

옛날에는 다 손으로 눈으로 다 그렇게 배웠어.
한 팀을 만들려면 상쇠 설장구는 잘 쳐야 되요.
리더도 잘 해야 하고.
그 사람에게 매달리는거야.
매달려서 팀을 만드는 거지.

만들어서 그 사람이 통솔을 해서 끌고 가게끔..
상쇠 설장구 소고 셋만 딱 맞으면 다 돌아가.


Q 선생님은 부포놀이 1인자라구요. 누구에게 배우셨어요?

부포는 박성선 선생님께 배운 거지.
세월이 좀 갔을 때는 김계옥 선생님께..
그 분이 부포를 잘 쳐 이걸 잘 돌려.
두 선생님 것을 내가 다 뺏어서 좋아진 거지.

제자들 보고 하는 얘기가
정읍에서 내가 돈이나 밝히고 그랬으면 이것 안했다.
그래서 지금도 돈은 못 번거지.

나이드셔서 어떻게 할려고 돈을 안 받고 가르치냐고 하지만
애들도 우리 집에서 많이 키워서 학교 보내고 그랬어요.

그런 걸 바래면 못 가르쳐요.
절대 못 가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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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정읍에는 언제부터 계셨어요?

정읍은 20살때부터 다녔어요.
선생님들 모시고 씨름대회 하면서 공연이 많으니까 나를 부르고.

어느 때는 쇳꾼이 없어.
선생님들은 나이드시고 장구지.
맨날 선생님들이 상쇠 영감님 이렇게 불렀어요.

이사 온 것은 마흔 살 즈음에 왔어요.
문화재 될려고 온 것은 아니고, 당분간만 좀 해주고 올라가야지 했는데...
어쩔것이여 문화재 됐으니까 여기서 살아야지.

맨 처음 내가 개인상 받은 건, 경상도에 가서 부포놀이로 장관상을 탓지..
그러다 30대에 전주대사습에 나갔고..
그땐 무서운 게 없었으니까 정말 잘 쳤지..

지금은 부포도 무거워, 무겁고, 돌리면, 어지럽고,
왜냐 매일 같이 해야 하는데 안 하쟎아 코로나가 망쳤어.

나이가 있고 젊어서 처럼은 못혀.
시립 농악단 제자들은 전공으로 가니까 괜찮고,
일반인들도 몇 년씩 배우는 사람들이 있어.

최고로 어려운 게 꽹과리 부포거든.


Q 유네스코에 농악이 등재되고 대우가 좀 달라졌나요?

뭐 달라져. 똑 같애 똑 같애..
내가 정읍에서 적응을 하고 사는 것은 내가 죽고 없어도
농악이 살아 남아야 할 것 아냐.

그래서 시립 농악단을 만든 거야.
그 동안 비상임이었다 작년에야 상임이 됐어.

내가 아직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필요하다면 가르쳐야지.

그러니까 운동도 하고.
코로나가 끝나면 제자들, 대한민국에서 배운 사람들 다 불러다가 몇 날 며칠이고 연습을 해 가지고 같이 한번 하는 거.

내가 아직은 제자들하고 같이 치면 나 못 따라와.. 따라 올수가 없어..
내가 가는 길이 있어 그렇게..

그걸 이틀이고 삼일이고 좀 며칠을 전국에서 와서 다 보고.
우리 정읍 농악이 이렇다는 걸 보고..
알기는 알지만 부러지게는 모르지. 자기가 안 치니까.

코로나-19 핑계대고 연습들을 안 해요.
요즘 하는 사람들은 하기 싫음 안 하고 아마추어들은 막 틀려도 괞챦아.
우리 옛날 사람들은 큰 일 나거든.

나보다 우리 새끼들이 잘해야 돼요. 난 그걸 권해요.
어차피 하는 것 최고가 되야 한다.
무대에 올라가서 너 혼자 치고 내려 올 일이 아니야.
내가 딱 올라가면 관중이 나한테 빨려 들어서 관중이 미쳐야 되거든..
그런 걸 강조를 해요.

맨날 그렇게 해도 듣는지 안듣는지를 모르겠어, 요새는 같이 늙어.
흰머리 나고 그러니 더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내가 기가 많이 죽은거지.
나이가 있으니까.



*** 인터뷰를 마치고

유지화 명인의 농악은 상쇠로서 또는 마당이나 무대에서 보여지는 가락과 춤에서 더욱 품격 높은 진가를 발휘한다.

“전라도가 멋이 있는 거지...
전라도 사람들은 같은 것을 해도 멋이 있어.
전라도 사람들이 확실히 멋이 있구나 그걸 내가 느꼈어요”

호남 우도농악의 중심지역으로서 그 찬란했던 정읍 농악의 명예를 되살리고자한 평생 외길 인생만을 고집하고 있는 유지화 명인.
진정한 예술가로서, 지금까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유지화 명인은 또 한 번의 멋진 꿈을 꾸고 있다.우도농악전수회관을 지었고.
정읍우도농악이 세계적인 놀이예술로 발전시키고 이어지는 희망을...

“20년만 젊으면 뭐든지 하겠어.
제자들도 더 잘 가르키고...
지금은 나이가 있으니까 제치는 거지...
혹시 실수하랑가 싶기도 하고....”


사진 동영상__유기승
글__정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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