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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호 개그맨. ‘바람의 영혼’ 디오게네스, 전유성의 쑈쑈쑈 “사실은 떨려요”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9-02 17:01 | 1,977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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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호 개그맨
‘바람의 영혼’ 디오게네스
전유성의 쑈쑈쑈 “사실은 떨려요”

‘개그계 대부’ 전유성


#1.

1969년 TBC ‘후라이보이의 쇼쇼쇼’의 방송작가로 데뷔해 5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대한민국 코미디계를 이끌어온 전유성이 데뷔 50주년을 맞아 지난 5월부터 중국 청도 까지 ‘전유성의 쑈쑈쑈’ 공연을 가졌다.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대한민국에서 사용한 ‘개그계의 아버지’로 불리며, 개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과 인맥으로 이번 공연에는 각 분야의 쟁쟁한 후배들이 번갈아 출연하며 음악, 토크, 개그, 마술까지 함께하는 화려한 퍼포먼스로 데뷔 50년 공연을 마무리 했다.

#2.

전유성은 주변 사람들이 50주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전에는 데뷔 50주년이라는 사실도 몰랐다고 한다. 이번 공연 부제를 ‘사실은 떨려요’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서도 여전히 이렇게 큰 무대에 서는 것은 “떨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개그맨 김학래는 “코미디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루는, 이때까지 대한민국 코미디가 이룬 모든 것에 영향을 줬고. 전유성의 숨결이 지금의 코미디 안에서도 숨 쉬고 있다”고 했고, 김지선은 “개그맨들의 아버지 같은 분”이고 아이디어가 막히면 전유성 선배를 찾아가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아이디어 뱅크이다.





Q 본인 소개 좀 해 보세요.

개그맨 이라는 이름으로 50년을 살아왔고 서울에서 태어 났어요.
지금은 남원에서 살고 있는데 편안해요.
제가 예전에 인월에 와서 3개월 정도 산적이 있어요.
언제가 시골 살면 여기에서 살아야지 했는데 우리 아이들 결혼했을 때 인월와서 살라고 애기 했더니 다행히 아이들이 거기서 살아서 기회가 돼서 왔어요.

취미는 매일 낮잠 자는거, 60이 넘어서 운동을 해서 몸짱이 된 친구에게 “70넘어서도 되니?” 했더니 “안돼” 그냥 걷기나 하라는데 산책 보다는 자전거 타고 많이 다녀요.


Q 전유성의 쑈쑈쑈는 어떻게 기획이 됐어요?

“사실은 떨려요” 제일 먼저 떨린다는 생각 이었어요.
서울 전주 제주 부산 대전 이렇게.
서울은 출연자 섭외가 쉽죠.
나와 주겠다는 후배가 많아서 자진해서 나오겠다는 후배 3분의 2하고, 제가 부탁한 사람 3분의 1은 표팔이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고...
제가 만약 요즘 개그맨 시험을 보면 연속으로 20번 보면 20번 다 떨어질거에요.
그나마 개그 원고를 쓰면서 이 자리에 붙어 있었고..
극을 하다보면 아이디어도 있고 연기도 잘하는 최양락도 필요하고, 임하룡 정말 잘 살리거든요.
저 같이 아이디어는 있는데 연기력이 떨어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다 조화롭게 있어야지 극이 된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역할을 제가 한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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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 후배들을 많이 키워 냈다구요?

이영자는 야간업소에서 일을 하는데 관객 장악력이 굉장히 뛰어 났어요.
스탠드 바는 손님들이 집중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관개들을 휘어잡고 애기를 하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쎄더라구요.

그래서 같이 하자고 했고, 먼저 하자고 한건 운이 좋았던거고, 저를 안 만났어도 이영자씨는 될 사람이었고..

어떤 친구는 개그를 관두지 않은 이유를 전유성 선배가 넌 될거야..
그때 막 관둘려고 할 때 용기가 생겨서 계속 했더니 정말 되더라 얘기 하는데 저 한테만 했겠어요?
왠만하면 다 했겠죠..
저는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 됐어요.


Q 아이디어로 기획자로써 한 말씀하시다면?

해외토픽을 봤더니... 미국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를 하고, 내가 대통령이 되고 싶은 때가 언제 였던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였데요.
그 교실에 앉아 개표상황을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기발해요.
우리가 가장 꿈이 컸을 때가 초등학교 시절이 아닌가?
그렇다면 초등학교 스타일로 카페를 만들면 그 생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래서 학교 스타일의 테마 카페를 처음 시작했죠.
제일 반대 했던 사람이 장사가 잘되니까 체인점하자 해서 했죠.


Q 후배와의 인연이 많죠?

사업은 잘 하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이영자씨가 확 뜨고 몇 달 사이 큰 돈을 버니까 왜 매니저 하지 않았냐고 하는데 매니저를 잘 하는 사람에게 갔기 때문에 된 거지 저는 그런 건 없어요.

최양락이 한 제 표현이 제일 맞는 것 같아요.

“형 애기는 들을 때는 그럴 듯 한데 조금만 생각하면 말짱 구라야 ㅋㅋㅋ”

언젠가 이문세씨가 절 찾아 왔어요.
목소리가 참 좋더라고.. 다정다감하다고 할까..
저는 제 주위에 목소리가 좋아서 가수가 된 친구들이 몇 명 있어요.
이 정도 목소리면 좋은 곡을 만들면 분명히 히트할거다 맞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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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예원예술 대학교는 어떻게 오셨어요?

누가 학교에 와서 교수를 하라고 하는데 제가 뭘 가르키겠어요.
그래서 안한다고 계속 거부를 했는데 2년 선배 고석만 피디가 계세요.
‘제5공화국’ ‘수사반장’ 그 분이 제 사수였어요.
“왠만하면 해 자식아” 그래서 선배 말이라 와서 했죠.

그 때 마침 코미디언이 좋아하는 코미디언을 뽑았는데 서영춘선배님이 뽑혔어요.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이야기 하면 안 해도 되겠지 해서 서영춘 동상 만들어 주면 할게 했더니 학교에서 흉상을 만들어 주셨어요.
만드신 분이 또 대중문화 예술인은 최초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내가 괜찮은 일을 하지 않았나?

더는 날 더 이상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만 뒀죠.


Q 그 때 배출한 학생이 누구예요?

조세호, 김신영, 한현민 등등 그때 여러 명이 있는데 실용음악과 무용과 국악과 같이 실습을 하는데 한현민이 저는 아무것도 준비 안 했습니다.
내가 너무나 정색을 해서 화를 내니까... 들어와서 배워서 할라구요.
그 때 제가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아요.

그렇지 여기가 학교지, 뽑는 방송국이 아닌데... 그거 하지 말자 실습을..
그랬으나 학교 시스템은 그게 안되더라구요.
그럼 나는 시험 보는데 안 들어간다 뽑아놓고 가르친다 그리고 안 들어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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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분수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학문적으로 공부한 게 아니고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한 알량한 지식 그거 하나 가지고 가르치는 좀 힘들었어요.

가르치다 보니 제 커리큘럼이 만들어졌죠.

예를 들어 생각을 다르게 한다. 제일 첫 번째 봄 하면 생각나는 걸 100개씩 적어라 10명이면 천개가 되죠.

한사람씩 나와서 지워라 그러면 열 개쯤 남은 사람.. 30개 남은 사람.. 남는게 다른 거죠.
누구나 다 생각하는 건 다 없애고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자기만의 생각을 만들어 주는 걸 로 시작을 했죠.


Q 지금 해보고 싶었는데 못한 것 있어요?

많아요.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말하기 싫어요.
그러나 내 인생이 성공 한 거라는 자부심도 있어요.
성공은 내가 판단하는 것보다 다른 것 하지 않고 한눈 팔지 않고 이것만 했구나.
그게 성공이라고 생각 하죠.

젊은 시절에 뭘 좀 하고 싶었는데 남들이 뭐라고 할까 봐 못 했던 거 나이 드시면 뭐라고 할 사람 없잖아요.
그런 것 해 보는 것 창의력을 갖는 고정 관념을 깨는 거라고 생각해요.


*** 인터뷰를 마치고

더는 날 더 이상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대학 교수직을 그만둔 전유성씨의 대답은 너무나 신선했고 나를 비롯한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절대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미음을 비우고 내려놓고 하는 것도 더 엄밀히 말하면 나를 더 이상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클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의 스승인 당대 인기 코미디언 후라이 보이 곽규석은 전유성의 대본만 보고 백만원을 맡겼다고 한다.
백만원은 당시 집 두채값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했는데 방송국에 들어와 시험을 보면 떨어졌고 나한테 야단맞았던 애들이 합격해 부끄러웠고 창피해서 방송을 출연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니 코미디 밖에 없다는 생각 들었다고...

그의 “쑈쑈쑈”는 정말 짜임새가 있었다.
그는 70대 신선한 어른이었다.
이번 공연은 중국 청도까지 잘 마쳤고 다시 전국 투어를 준비 한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수식어가 많은 그의 이력에 전유성의 쑈쑈쑈 “사실은 떨려요” 가 또 한번 그의 한국 최초 이력으로 남기를 바란다


? 사진 동영상 : 多陽
? : 김세영 방송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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