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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년 문화유산의 脈, 가야금에 혼을 불어넣는 악기장의 길,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2호 고수환 악기장(가야금)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8-27 14:59 | 2,714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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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년 문화유산의 脈
가야금에 혼을 불어넣는
‘악기장의 길’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제12호
고수환 악기장(가야금)


#1.

16살 때부터 가야금을 만들기 시작해서 올해 54년 됐어요.
아버지가 한문을 가르쳐서 한약사를 만들려고 했죠.
농촌에서 어려운 사람 치료해주라고 그래서 한문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내 공부 길을 막으려고 했나 누나가 찾아 와서, 가야금 만드는 곳에서 사람이 하나 필요한데 가서 기술을 배우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 가야금이 뭔가도 모르고, 본 적도 없고..
통나무에서 나오는 소리가 신기하고, 깍는 것, 만드는 것 좋아해서 가야금을 보는 순간, 반했어요.
저거 참 재미 있네 싶었고.. 그러다 오늘까지 온 거예요.

#2.

스트라디 바리우스가 바이얼린을 만든 계절이, 엄청 추워서 좋은 나무가 많았을 거라고 해요.
그래서 많이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악기가 좋으니까 계속 보전이 됐고, 서양악기는 100년 200년 쓰는데, 가야금은 최고 수명이 50년정도일까?
서양악기는 철선이고 코드를 집으면 되고, 활만 움직이면 되지만...
가야금은 연주기법이 활 시위를 댕기는 것 같아요.
서양 악기를 가야금처럼 농현하면 오래 쓸 것 같아요?
연주 방법에 따라 수명은 길수도 있고 짦을 수도 있고..
지금도 내가 처음 만든 악기가 골동품상에 있어요.
가야금은 나무 통으로 만들어서 줄만 갈면 얼마든지 연주가 가능해요.





Q 가야금은 제작하는데 몇 과정이 필요해요?

나무를 고르고 가르고, 찍고 밀고 수 만 번의 손이 가요.
그 당시 가야금 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처우도 안 되고 거기서 왜 안 나오고 있었는지는 나도 몰라요.
깍는 게 좋아서 했다고 하면 그게 뭐 좋아서 했냐고도 하겠지만..
한문공부가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김광주선생이 사람을 찾았고 나보고 오라고 했어요.
그때 내가 그쪽으로 갔으면, 지금 대한민국 최고가 됐죠.
큰 스승 밑에 큰 제자가 나오니까...
그러나 상대방 주인이 어렵다고 배신하고 나올 수가 없더라구요.
산에 가서 나무해서 불 때고, 먹을 쌀도 없어 외상으로 먹다, 가야금 팔면 갚고..
초가지붕 이을 짚 살돈도 없고..
그런데 왜 안 나오고 거기 있었냐고..
나도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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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언제부터 빛을 보기 시작 했어요?

나는 좀 빨랐어요.
안족을 깍는 손 놀림이 빨랐어요.
선생님은 하루에 24개정도 깍는데 나는 120개를 깍아요.
그러면서 1968년 국민교육 헌장이 발표 되고, 우리 조상의 얼을 오늘에 되살린다는 대목이 나오지요.
옛날 그리고 우리 것을 찾는 운동이 많이 벌어져요.
서울의 국악사양성소, 국악고등학교, 예술학교 한양대 국악과 등등이 생기면서 엄청 바빠져요.
19살쯤 거의 기술자가 됐어요.
그때 배운 건데, 일은 많이 한 사람이 기술이 는다는 것을 알았죠.
소질도 있어야 하고..
22살 부터 최고의 기술자가 되요.


Q 당시 가야금은 어느 동네가 제일 잘 만들었어요?

그 때도 전주의 김광주 선생님였고.. 그 밑에는 김종렬, 최태진선생 등등이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람들이 어느 정도 돈을 벌으니까 나가서 독립을 하고 그러다 보니 내가 필요한 거죠.
그러나 이분들도 먹고 살기 어렵고 시장은 적으니까.. 하나 둘씩 서울로 가요.
김광주, 김명철선생이 서울로 먼저 갔죠.
그 당시, 최고 연주자는 많이 있지만 악기 숙련공은 없었어요.
가야금 10개를 만들어도 1개나 쓸까 말까 할 때였거든요.


Q 좋은 가야금은 어떻게 만들어 지나요?

석상 오동이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있나요?
확실히 벼락 맞은 오동은 좋은 것 같아요.
일반 오동은 기름진 땅에서 재배해서 만든 거라 속성으로 자라요.
속성으로 자란 것은 수분을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음색이 금방 변하고..
그렇다고 최고의 나무로 가야금 만든다고 소리가 잘 나는 건 아니거든요.
강도에 따라 두께를 조절해야 되요.
그것이 기술인데, 거기까지 가는 데가 사실은 어려운거예요.
경험으로 해야 하거든요.
연주가와 만드는 사람의 조화 속에 악기가 발전하거든요.
두터운 나무는 좀 얇게.. 얋은 나무는 좀 두텁게..
그것도 이치가 다 다르고,,
이게 바로 비법인데 그것은 말로 설명해도 잘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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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금까지 몇 개나 만들고 마음에 드는 건 몇 개예요?

수도 없이 만들었지만 글쎄 완벽하다고 생각 하는 건 몇 대 없어요.
그게 너무 알아서 그런 것 같아요 연주를 해 봤쟎아요.
젊을 때 가야금을 좀 배웠어요. 황병주 선생님한테..
아뭏튼 뭔가 좀 미진하고,, 한 가지 공정이라야, 뜯고 다시 만들지,
그런데 마음이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악기가 가고..
까다로운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악기가 가도 그렇고 그런 것 같아요.


Q 악기 수명은 어때요?

난 적어도 50년은 써야 한다고 봐요.
어떤 사람은 악기가 소모품이라고도 하는 말도 안 돼는 소리를 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예요.
처음부터 왕왕왕 울리는 악기가 좋은 악기라고도 하고, 악기는 만들 때 처음에는 약간 힘이 들어야 그게 길이 나면 50년 정도를 쓸 수 있어요.
처음부터 울리는 소리가 나게 만들면 1년 되면 음이 변해요.
선생들도 처음에 악기 골라줄 때 제자들에게 너는, 이 악기 50년은 쓸 수 있더고 가르치면 좋겠어요.


Q 다양한 가야금의 변화는 언제부터 있었나요?

성금연 선생 시절에도 15현은 있었어요.
12줄로 음악을 하다보면 음계가 부족하거든요.
그러다 정악팀에서 15현은 전통악기가 아니다 해서 안 쓰게 됐는데, 대학에서 전공하다 보니까 또 음계가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21현이 나왔고, 18현, 이미 중국에서는 25현을 썼어요.
연변대학에서 박유실이라는 교환교수가 와요.
이분과 함께 다양한 음악을 만들면서 25현 가야금과 연주가 확산되죠.
악기를 만드는 방법은 벌 다른 것 없어요.
통이 커지고 줄이 늘어나는 정도,,,
18현 25현등등은 사실 만들고 연주하는 사람은 많지만 깊이는 없거든요.
자칫 전통음악이 사라질까 걱정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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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야금 연주는 어떻게 배우게 됐어요?

제대하고 국립극장에서 일을 해요.
악기를 연주해야 소리를 만드는데 무슨 역할을 하지 배우지 않고는 안 되겠다 싶은 거예요.
가야금을 배우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서울 연주자들은 공연이 잡히면 악기를 조율하러 와요.
그 당시 지방에서는 미끄덩거리는 것으로 연주를 하고..
사실 연주 할 때는 꼭 악기를 손 봐야 해요. 피아노도 조율하쟎아요.
그 시절 돌아가신 황병주 선생님이 우리 공장에 오셨어요.
제가 돈이 없어 레슨비를 드리지는 못 하지만, 최고 악기를 하나 만들어 드릴테니까 좀 가르쳐 주십시오 했더니, 좋다고 하셔서.
월 수 금 종로애서 장충동까지 걸어 다니면서, 곡을 다 외우고. 그때 같이 배운 사람은 고등학교 2학년인 민의식 교수였어요.
따디 딴딴따 하면서 걷다 곡을 잊어버리면 집에 와서 선생님보고 전화로 한번 타 달라고 해서, 마저 외우고..
“어이 전라도 사람이라 다르고만 이제 그만 배워도 되겠네” 하셔서 그만 뒀죠. 그때 내가 제대로 배웠으면 연주자가 됐을 거예요.


Q 어느 때 가장 보람을 느껴요?

연주자들이 내 악기를 가지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걸 볼 때 참 좋아요.
처음 고등하교 들어갈 때 악기를 사고 대학가면 악기를 바꾸죠.
그러다 철 들면 선생님 악기가 제일 좋아요. 할 때가 좋아요.
후계자는 지금까지 2사람 나왔고, 아들이 지금 한 10여년 전부터 같이 해요.
아내가 결혼하기 전에 당사주를 봤는데, 둘째가 가야금을 들고 나오더래요.
처음 악기 시작할 때 50년 후를 생각헀어요.
지금은 내가 1등이 아니어도 그 때까지 악기가 얼마나 살아 남았나,,
이건 누가 만든 악기데 아직도 연주 한다 그게 가장 성공한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현재는 전미동에 공장이 있어요.
가야금 줄 길이가 50미터가 돼야 하는데, IMF 때 사서 고생했지만 전 과정을 한 자리에서 만들 수 있어 좋아요.


*** 인터뷰를 마치고

고수환 악기장은 가야금 배울 때 가장 힘든 건 누나의 잔소리였다고 했다.
한문에서 인내를 배워서 그 힘으로 이겼다고 했을 때 인문학의 힘을 느꼈다.
가야금 분야의 대가인 김광주, 김봉기 명인의 2개 계보를 사사한 후 오직 현악기 제작만 50여년..
목재의 마름질부터 줄 꼬우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전승되는 제작과정을 원형 그대로 지닌 명인이다.
오래전에 제작된 현악기를 수집하고, 과거 악기를 분석해서 가야금의 최대 수명인 50년 동안 맑은 음색이 변치 않는다는 연주가의 평도 받고 있다.
그의 평생 이런 노력은 각종 공예대전의 입상과, 1991년 품질우수로 스페인 골든 트로피를 수상하기도 했다.

지금 더 많은 훌륭한 된 한국음악의 연주자를 키워내야 하는 이때, 대학에서부터 국악과를 없애고 있어 정말 걱정이다.
그가 관심 있어 하는 전승공예 연구와, 국악기의 기능보존도 더욱 할성화되기 바란다.
그리고 전라북도 국악원 옆에 자리한 전주국악기에 가면 그가 만든 법금, 가야금과 거문고, 양금 해금 아쟁 등등 현악기는 다 볼 수 있고 구입할 수 있다.


? 사진 동영상 : 多陽
? : 정여름 방송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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