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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자의 지역역사, 문화찾기는 변증법적 상상력? - 이종민 교수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9-06-27 15:33 | 2,656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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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자의 지역역사, 문화찾기는 변증법적 상상력?

이종민 전북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 천년전주 사랑모임 상임이사


#1.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활동하다 전남 진도에서 일본군에 의해 처형된 농민군 지도자의 머리뼈가, 인종학 연구대상으로 일본인에 의해 1906년 9월 일본으로 유출, 1995년 7월 일본 북해도대학 표본창구에서 발견돼, 사단법인 동학농민기념사업회는 1996년 5월 국내로 모셔왔지만, 지난 23년간 잠들 곳을 찾지 못해 그동안 전주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왔었다.

그러다, 지난 6월 1일 동학농민혁명의 승전지인 전주에서 안장식을 거행했는데 전주시는 이번 동학농민군 지도자 안장을 계기로 아시아 최초로 근대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사람 중심의 동학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종민 교수는 그분을 일본에서 모셔온 게 23년 전인데, 안장을 하려고 그동안 진도에 2번, 황토현 전적지 등에 2번 등 신청했지만 잘 안됐고, 전주에서, 2015년에 모시겠다고 하니 갑자기 진도에서 법정 가처분 신청까지 해서 이번 안장식에 꽤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2.

1956년에 완주 화산에서 태어난 이종민 교수는, 「용서의 서사시 - 블레이크의 [예루살렘]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 교환교수, 서울대학교 교류교수를 거쳐 현재 전북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4년부터는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 단장을 맡아 전주를 가장 한국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천년전주사랑이라는 민간조직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2002년 겨울부터 음악편지를 이용해 북한 어린이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고,
저서로는 전북대학교 학술총서 첫 번 째 책인 월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세계 『변중법적 상상력』 『그래 너희 뜻대로 해라』(황금가지, 공저), 『달궁 가는 길: 서정인의 삶과 문학』(서해문집, 편저), 『이종민의 음악편지: 음악, 화살처럼 꽂히다』(서해문집), 『이종민의 음악편지 둘: 화양연가』(이지출판), 『이종민의 추수객담: 미치거나 즐기거나』(이지출판), 『이종민의 음악편지 셋: 흑백다방의 추억』(범우사) 등이 있다.





Q 이번 6월 동학농민군지도자 안장식으로 바쁘셨죠. 일은 다 끝났나요?

진도에서는 반환소송을 하겠다네요.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기념사업은 사실은 어떤 1회적인 사건이나 행사로 종료되는 것은 아니고 더욱 더 지속적으로 계승 발전 되야겠죠. 이걸 계기로 지속적인 활동을 해야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정신이 제대로만 구현이 되면 이 사회가 훨씬 더 성숙한 사회로 나가리라고 보기 때문에, 기념사업은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죠. 전주는 아주 중요한 역사지점을 확보 했다고 봐요.

녹두관이 들어섰고 그 아래쪽에 파랑새관이라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이 만들어져요. 그럼 그 일대가 역사벨트가 되는 거고,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동학농민혁명의 위상에 대한 부분도 체계적으로 정돈이 안 돼서 그런 작업들도 앞으로 계속 해 나가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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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교수님은 영문학자인데 어떻게 동학에 관한 일을 하시게 됐어요?

우연이기도 하고, 저는 지역의 역사, 지역의 문화에 관심을 갖자는 생각을 했고, 대학교수로써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데 외국문학도들은 사실 그 길을 찾기가 쉽지가 않아요.

제가 외국문학도로써 한 게 뭔가? 지역문화에 기여하는 것,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 다가오는데 지역에서 준비하자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제창을 했죠. 그게 1991년쯤 될 거예요.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띄우고, 사단법인 형태로 만들고, 제가 사무총장도 하고, 국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동학농민혁명을 보는 것과, 외국문학도로써 동학농민혁명을 보는 것은 좀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에도 국제학술대회 주제를, 일제 제국주의 침탈과 인권평화운동으로 잡았더니,
일본 오끼나와에서 오신 분들이 정말 좋다고,
우리 동학이 너무 안에서만 토론 했는데 청일전쟁의 인권 수탈이 어떻게 이뤄졌는가?
인권 상황이 어떻게 진행 됐나? 를 포괄적으로 토론하니까 좋다고 했고,
이런 기획은 외국 문학도니까 깊이는 못 봐도 그런 게 있어요.

전주를 혁명의 도시로 하자. 세계 혁명박물관이 전주에 하나 있었으면.. 생각했고,
전주에서 세계 모든 혁명들이 어떻게 진행됐고 성격이 어떻고...
세계 3대혁명, 국제 학술대회, 5대혁명 학술대회 이런 것들을 기획해 왔거든요.


Q 고향 밖에서 나의 꿈을 더 크게 키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일찍 대학교수가 됐어요. 자리가 안정 되니까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을 꿈꾸고 기획했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 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전통문화 쪽 일도 좀 했어요.
외국에서 국가 차원의 문화정책들을 어떻게 펴는가?
영국이 섹스피어를 내세워서 어떻게 영국문화를 세계적인 문화로 키워 왔는가?
미국은 미국학연구소를 중심으로 미국 학문을 전 세계 사람들이 동경하게 만들었는가?
이런 것들을 아니까 우리의 문화정책도 이런 부분을 계승해야 되고 그런 부분을 본 받을 건 본 받아야 하고..
그런 차원에서 저는 한국학 부흥운동을 하는데, 제가 처음에 시작했던 지역문화 운동 하고 다 맥을 같이 하는 거죠.


Q 학문의 교류를 강조하시던데요?

이제 자기 전공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공자 말씀대로 군자는 그릇과 같은 존재가 돼서는 안된다는 거죠.
어떤 기능인으로 갇혀서도 안 되고... 영문학자이지만, 영문학도 좀 포괄적으로 봐야하고,
그 영문학 연구가 우리 문화나 문학의 연구에, 바람직한 시각을 제시 하는데 기여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제가 영문학자로써 영문학을 깊이 있게 했을 때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그건 태생적 한계가 있거든요.
오히려 역량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확산 시키자, 전통문화와 관련해서도 이 일에 관련된 사람이 하면 당당하게 애기를 못해요.

그런데 외국 문학도가 우리 전통문화가 중요하고, 한국학이 중요해서 한국학 비엔날레를 해야 한다고 하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고, 예산부서에서도 진정성으로, 오히려 더 쉽게 설득할 수 있는 거죠. 그런 면에선 저는 일을 참 재미있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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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딸에게 한국 음악을 권유하셨다구요?

미국 교환교수 잠깐 갔다 왔을 때, 94년 95년에.. 미국 사람들 보니까 피아노 바이올린 이런 레슨이 붐 이예요.
한국도 생활이 좋아지면 우리 전통 음악 수요도 많이 늘어날 것 같고, 가야금 레슨도 많아질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딸이 중학교 막 들어갈 땐데 한국음악에 대한 위상이랄까 이런 게 앞으로 더 높아질 권했고,,,

지금 제 예상은 완전히 어긋났어요.
서양음악 수요가 워낙 많아서...
한국음악이 제대로 정착이 되려면 세계 보편 음악의 어떤 코드를 같이 써야 한다, 악보도, 서양음악 공부도 튼튼히 할 수 있는 게 좋겠다 싶어, 유학을 권했고...
지금 하와이 대학에서 세계 보편음악의 코드로 한국음악을 해석 하는 공부를 하고 있어요.


Q 그동안에 해오신 문화정책이 있다면?

문화저널이라는 잡지를 오랫동안 했어요.
지역문화가 얼마나 중요하고 지역의 역사가 얼마나 소중 한 것인지 이런 부분들을 좀 확산 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는 한 거 같고,
관이나 정부차원이 아닌 민간 쪽에서 자생력을 갖춰야만 문화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부분들을 운동을 통해서 확인 시키는 것이 나름 데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전주 전통문화도시 만들기가 진행이 됐고,
한옥마을이 활성화 됐고 지금은 엄청난 관광지가 됐죠.

내가 꿈꾸던 거 하고는 좀 다르지만..
이런 부분이 좀 아쉬움이 있어요.


Q 문화사업과, 학교에서도 인문학 활성화를 위한 일을 많이 하셨죠?

한옥마을 활성화 구도심 활성화에 전주가 모범을 보인 거 쟎아요.
그걸 통해서 우리 전통문화가 이게 그냥 버릴 것은 아니구나. 그 부분은 다른 지자체에게도 상당한 자신감을 심어 줬죠.

지금 어느 지자체든 관광단지에 가면 한복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요.
처음으로 전주에서 시작 했어요.
한옥마을 때문에 가능했고, 박물관이나 궁이나 한복입고 다니는 외국인들도 굉장히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 문화를 활성화 시키고 세계화 시키는데 미약하지만 약간의 역할은 했다고 생각하고..
최근에 학교에서 인문역량강화 사업단을 3년간 이끌었어요.
1년에 30억 정도..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육지원프로그램도 하고 인문학 후속세대들을 후속세대를 키워 내는 일을 통해서 인문학으로 고민하는 전국의 인문학자들과 네트워크도 했고, 올 2월 말로 끝났는데 후속사업이 이어지지 않은 것은 안타깝지만..

사실 학교에 조금 미안 했어요.
그동안 밖에 일을 주로 많이 했고,
학교는 강의 하고 논문 좀 쓰고.. 이번 3년간 봉사하면서 학교에 할 만큼 했다.
학장 2년하고 그 다음 추진단 3년하고 1년은 겹치지만,,
4년 동안은 정말 열심히 학교에 봉사를 했고 저에게는 큰 보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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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천년 전주 사랑 모임은 어떻게 시작했어요?

전통문화도시 만드는 게 전주시 기획이잖아요.
그러나 지자체의 의지만 가지고는 절대로 안 된다 오히려 왜곡 될 수 있다. 그래서 자발적인 민간조직이 있어야 되고 민간조직은 지속적으로 하는 거지만, 지자체는 장이 바뀌면 완전히 정책 자체가 틀어져요.
누구는 전통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누구는 산업화나나 관광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정책이 어긋나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훨씬 더 왜곡 될 수 있는 거고..
저는 그런 부분에서 전통문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진정성 있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자발적인 모임이 필요하다 해서 그런 조직을 만들었어요.


Q 은퇴 후에 계획은요?

갤러리 카페를 꿈꿔요. 문화 터전을 하나 마련해서..
그 곳이 시골생활을 활성화하는데 중요한 터전으로 기여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의 삶의 형태가 바람직한 형태는 아니라고 봐요.
이건 분명히 뭔가 잘못 가고 있는데 그나마 완화시키거나 약간의 교정이 가능한 것이 농촌이라고 봤어요.
농업이 다시 우리 중심산업으로 돼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그러려면 농촌이 살만한 곳 이라고 하는 것을 좀 느낄 수 있게 해 줘야 하는데, 제가 그런 역할을 미흡하지만 앞으로 좀 하고 싶어요.

安貧樂道, 그런 정신적 그런 차원이 아니고,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일단 생활비가 크게 안 들고 많이 안 벌어도 되고..
그렇게 되면 이런 각박한, 너무나 많은 쓰레기를 남기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젊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인프라가 농촌에도 자리를 잡아야 하고 제가 그런 걸 좀 해 놓으면 어떨까? 그런 꿈을 가지고는 있어요.


*** 인터뷰를 마치고

요즘 이종민 교수는 고향을 중심으로 한 농촌지역의 활성화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귀촌, 귀농농가의 문화적 수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완주문화재단에서 하는, 다양한 사업을 연계해 주니까 아주 즐거워해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젊은이들에게도 농촌에서 즐겁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는 게 앞으로 할 일이고 얼마 남지 않은 정년퇴직 이후 꼭 하고 싶은 일이라는 그의 바람에서 천년 전라도 사랑모임이 탄생되길 기대한다.

그동안, 한국비엔날레를 세 차례 하면서 좀 지치기도 했지만, 전 세계 한국학자들을 전주에 초대해서, 한국학을 제대로 알려면 한국문화를 알아야 하고, 그 한국 문화를 단 시간내에 알 수 있는 곳이 전주이고, 여기에 와서 1박2일 학술대회, 문화체험 하고 나면 달라질거다 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 결과, 이 분들이 아주 좋아해서, 이런 다양한 기획도 외국문학도여서 가능하지 않았다 싶다고 했다.


그는 효자다.
2018년 7월 'SBS스페셜' 미스터리한 나의 어머니 황정례,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서는 어머니의 시간을 기록하는 아들 이종민 교수가 소개됐다.

'오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잊어야 할 것은 정작 잊지 못하는 짐처럼 무겁게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이종민, <망각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中


고향집 화산면 화평리에서 치매가 시작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축사가 많이 들어섰고 동네 풍경이나 인심도 많이 변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렇게 도도했던 어머니가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아들의 애틋함에서 쓴 이글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구입한 ‘변증법적 상상력’은 나부터, 내 주변 친구들까지 읽어 내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지만 이 쪽의 전문가들은 보기 드문 아주 빼어난 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 사진 동영상 : 多陽
? : 김세영 방송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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