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내 편으로 만들고, 말하는 이주리 시인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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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내편으로 만들고... 말하고..
시적수필 새로운 장르 개척
은퇴후 인생 2막2장은 소설가로....
이주리 시인 · 수필가
#1.
언어 구사력의 디엔에이(DNA)를 물려받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이주리 작가는 2006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2007년 현대문학 수필작가 외 e-수필 신인상과 2009년 현대시문학 신인상을 수상했고,
직장에서는 2016년 고용노동부 장관상을 수상했고
2009년 시집‘도공과 막사발’ 2020년 수필집 ‘고통과의 하이파이브’를 냈다.
‘미래시학’에 특집으로 ‘수필로 떠나는 판소리 실크로드’라는 제목으로 4부작外에도
‘미당문학’ ‘우리시’ ‘수필세계’ ‘좋은 수필’ 등에 이주리 시인의 시와 수필이 실린 문예지가 다수 있다.
#2.
어느 날 문득 현실과 사람이 주는 상처 뿐 아니라 나비의 공허한 날개짓, 꽃의 안쓰러운 흐드러짐이 다 아프게 느껴질 때 글을 내편으로 만들고 말하고 동의를 구하고 글에게 빠지게 됐다고 이 작가는 말한다.
전지당한 정원 목련나무를 보고 쓴 글 “얼마나 안으로 몸부림을 쳤으면, 얼마나 영혼의 굴레에 속앓이를 했으면, 가지에 저리 몽글몽글 사리를 달고 있을까?”
딸이 낙심하고 있을 때 “저 꽃들을 봐라. 저 꽃들은 창피하다고 해서 봄에 꽃 피우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저 돌들을 봐라. 햇볕이 뜨겁다고, 아프게 밟힌다고, 저 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삶에서 건져 올린 개성 강한 다양한 소재를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절제된 언어로 진솔하게 다루면서, 아름다운 어휘 구사력으로 주옥처럼 다듬어낸 표현은 “한편 한편의 글이 전부 시나 다름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Q 본인 소개를 해 주세요.
시와 수필을 쓰고 있고 전주고용센타에서 근무하는 이주리 작가입니다.
어렸을 떄 부터 집안에 시 쓰시는 분, 외삼촌도 시를 쓰셨고 엄마도 시인이셔서 “시” 라는게 굉장히 공허한 언어적 유희인줄 알았는데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제가 뒤늦게 마흔이 넘어서 등단을 하고 나서 알았습니다.
Q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게 됐어요?
제가 어떤 걸 의식하지 못했을 때부터 있었던 내면적인 언어가 43살 44살.. 40대 중반이 돼서 옷을 입고 뛰쳐 나왔다고 해야 맞아요.
그래서 그 때부터 글을 써야겠다라는 생각도 없이 일기장에 차곡차곡 쓰면서 내 보이니까 당선이 됐어요. 신인상 당선도 되고.
글과 문단에 대해서 잘 이끌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문학에 대한 공부도 없이 얼떨떨하게 등단이 됐습니다.
Q 그 당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이유가 있었어요?
저는 38살이 될 때 까지도 돈을 번다는 걸 몰랐어요.
현실을 전혀 모르고 교사를 할 때에도 애기 선생님이라 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도 없었고 그냥 곱기만 했던 것 같아요.
근데 40이 넘어서 아이 둘을 업고 어디 손잡을 데, 발 디딜데도 없이 그냥 8층 건물 난간에 서 있었던 기분이랄까?
그 당시 거의 비명처럼 글이 내면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종의 치유였죠.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글에게 얘기를 했고 글이 저를 받아 줘서 그걸 지금까지 놓지 않고 했던 것 같습니다.
Q 데뷔 작품 이야기를 하죠.
공식적으로는 2006년도에 수필, 2009년도에 시로 등단을 하게 됐어요.
체계적으로 공부를 시에 대해서 했고, 문단에 대해서 이끌어 주고 하는 멘토가 없었어요.
제 시는 형식적이지 않고 기존에 있었던 어떤 시 하고도 이상하게 다르고.. 그래도 독자 들이 좋아 하셨고..
저는 시에 대한 문학적인 지식보다는 진솔하고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작년에 수필집이 나왔어요.
시집은 2009년도에 나왔고, 저는 다작시인이 못 되는 것 같아요.
늘 제한적인 시간에 걸리고 문단에 대해 글에 대한 욕망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게 좀 아쉬운 부분이에요.
앞으로 정년퇴직하고 24시간은 맘 데로 쓸 수 있어서 다작을 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Q 생물 선생님도 하고 독일 유학도 하셨어요?
87년도에 결혼을 하면서, 공부하는 남편을 따라서 독일을 갔어요.
선생님은 84년 3월부터 87년 2월 28일까지 만 3년정도.
독일을 갈 때 아무것도 모르고 가서 수업시간에 교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다른 분들은 막 웃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노래처럼 들렸어요.
욕심껏 랩 실에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출산을 하고 전업주부로 있다가, 제가 돈을 벌지 않음 안 될 상황들이 있었고, 나이가 40이 넘어서 노동부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Q 정년을 앞두고 요즘 생각이 많으시죠?
정년을 맞으면서 온통 후회라고 할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결핍을 안으로 간직하는 아이로 키웠다는 게 마음이 아프고,
직장생활에서는 나름 데로 승진보다 가치를 민원인들한테 기준이나 가치를 두고 살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지도 않고.
글에 대해서도 욕망 없이 썼다라고 애기를 하지만 실지로는 욕망을 꿈꾸기도 했었던 기억도 있고..
글 잘 쓰시는 분들 보면 부럽기도 하고..
정말 좋은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시 다운 시를 써 본적이 없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Q 고용센타 현장에서 직업의 가치를 많이 생각했을 것 같은데요
예전에 선배분이 “여러분들은 한 가족을 구원하는 위치에 서 있는 분들입니다.
한 사람에게 취업을 시켜 준다는 것은 한 가정을 구원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시는데 그 말이 마음에 새겨 졌어요.
남원고용센타에 있을 때 실업급여 자격이 되려면 이직확인서를 보내 줘야 하는데, 올망졸망한 아이 셋을 두고 여성 가장이 자진퇴사로 온 거예요.
제가 한달 반을 회사에 쫒아 다니면서 회사 사정으로 실제로 해고를 하고 자진퇴사로 한 걸 증명으로 실업급여를 해 드린 적이 있어요.
식당에서 설거지 하면서 아이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그 분이 너무 고맙다고 했었을 때 마음에 느낌이 컸어요.
Q 염두고도의 저자 김용근 선생님도 남원에서 만나셨죠?
선생님을 만나건 저에게 행운입니다.
동편제 판소리에 대한 자료들을 본인 자비로, 발품을 팔아서 그 당시 20년 넘게 가지고 계신 분인데 그 자료들을 가지고 문학화 해 주면 좋겠다고 하셨고 또 문학화 해서 소설로 좀 써 주시면 어떠냐고 하셨어요.
작품을 쓸려면 자료들도 많이 있어야 하는데 따라다니다 보면서 자연적으로 체득이 됐어요.
언젠가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확보가 안 됐어요.
그래서 기행수필처럼 몇 꼭지를 써 놓게 되면 그걸 기본으로 해서 장편이라도 하나 나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기행수필은 저 나름대로 기록적인 면에서 쓰게 됐는데 미래 시학에 특집으로 나왔습니다.
Q 은퇴이후의 계획은요?
소속이 없어진다는 것 자체가 무한한 자유이면서 무한한 책임이 주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6개월은 좀 쉬고 여행도 다니고 그러고 나서는 진지하게 우선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쓰기 전에 많은 것들을 읽고 그 다음에는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다른 분들은 몇 십권 저서를 냈는데 저는 시집 2권 수필집 2권 소설 2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쓰기에도 시간이 많지는 않다 라는 생각이 들고,
소설은 한국에서 여인으로 산다는 것, 사회적인 것 이외 여인의 내면적인 것들을 조명해 보고, 문화, 판소리外 지리산권 문화를 사료나 자료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 자연스럽게 흡수가 되고 전달이 되는 문학으로 추구해 보고 싶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휴머니즘으로 표백된 사색과 응시, 시적 수필로 담아낸 인생철학의 고백성사가 바로 이주리 작가의 작품론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라고 전북문인협회 라병훈 평론가는 말한다.
2021년 6월 정년퇴직하면 24시간은 맘대로 쓸 수 있어서 다작을 해 볼까 생각하고 있다는 이 작가는 인생의 2막2작을 기다리고 있다.
시적 수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듯이 그가 그려내고 싶은 다양한 이야기는 소설과 시와 수필이라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되 천박하지 않고 우리의 귓가에 진실만을 나지막하게 고백하고 속삭임 할 수 있는 진정한 작품이 나오기를 SNS에서 독자들과 소통하는 친구 5,000명과 함께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