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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天命. 야구인생 40년, 임기정 야구 지도자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8-06-29 13:03 | 2,937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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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天命.야구인생 40년
고려대 감독이 돼서...
86세 어머니께 꼭 효도하고 싶어요.

임기정 야구 지도자


#1.

1985년 추석전날 제 39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전주고가 처음으로 결승전을 하고 우승을 했어요.
전라북도가 난리가 났어요. 전주시내에서 카 페레이드도 하고 호외를 날렸어요.
저는 4번 타자였고 최우수선수상과 타격상을 수상했죠.

그 이후 30년 동안 빅 경기에서 전주고는 한번도 우승을 못하고 있어요.
그 당시 군산상고는 조계현, 장호익, 한경수, 고장량, 1년차 이관우 최해식선수로 구성이 되 있고, 전주고는 박성기, 임기정 등등..
지금 프로에서 활동하는 박경환, 김원영 등 저하고 좀 차이는 있지만 전주고 후배죠.

#2.

전주 리틀야구단은 2009년 12월에 출범이 됐어요.
처음에는 20명 정도 그 후 점차적으로 소문이 나면서 한때는 60명도 넘었어요.
인구 감소는 스포츠까지 미치죠.
그래서 지금은 엘리트 보다 클럽식으로 전환이 되고 있어요.

전주 리틀 야구단은 일주일에 두 번 만나서 야구놀이 하는 팀이에요.
그래도 오래 하다 보니, 기량이 보이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러면 야구 전문 중학교로 진학해서 엘리트 코스를 밝을 수 있도록 하죠.

입단에 제약이 없고 건강 때문에 오는 경우도 있고,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땅을 밝는 기회를 주는 게 좋아요.





Q 초등학교 시절 야구를 하게 된 계기는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학습에 대한 열정이 강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운동을 아주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축구를 하게 됐죠. 너무나 힘든 거예요.
그런데 야구는 타순이 지나면 자기 순서가 될 때까지 쉬거든요. 그래서 아 저거다 싶었는데 야구 담담선생님에게 스카웃이 된 거예요. 너무 좋았어요.
제가 운동 신경이 좀 있었나봐요.
그러나 야구는 정말 어려워요. 전문성이 뒤따르지 않으면 훈련만 해서 되는 운동이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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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언제부터 야구가 좀 할 만 했어요?

1984년 85년 야구를 좀 하네 이런 소리를 듣게 됐죠. 전주 고둥학교 2-3학년 때죠.
그 당시 고교 야구가 인기가 있었는데 군산상고는 일년에 1번씩 우승을 할 정도로 기량이 좋았고...
지금 기아 타이거즈 단장을 하고 있는 조계현 투수를 비롯, 대통령배 봉황기 청룡기 황금사자가기 나가기만 하면 우승을 하는데,
우리가 85년 황금사자기 전국 고교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제가 타격상하고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면서 전주고도 나도 야구 인생의 꽃이 핀 거예요.


Q 그 후 고려대학교로 진학을 했죠?

많은 사람들은 제가 우승을 해서 고대로 간 줄 아는데, 사실은 84년도 8월에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스카웃이 됐어요.
주가는 고 3때 우승을 해서 더 올라갔고..
드디어 대학 생활이 시작 됐어요. 대학을 가니, 83년도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주역인 신현옥, 김판근, 야구에는 노찬엽 등등 이런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는거예요.
그러니 기가 죽어서 내 영역이 없는거예요.

그렇게 1년을 버텼어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부터 프로 시절까지 가장 힘든 시간이 86년도 대학교 1학년 때 였어요.
고등학교 시절에는 쨩이었는데 고대 가니까 전부다 국가대표 청소년 대표인거예요.
그래서 순간 내가 주전선수가 되고 시합에 나갈수 있을까 고민했죠.
프로에 갈수 있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그 때 좀 많이 방황을 했어요.


Q 위기가 있었군요.

2학년때는 좀 풀리더라구요. 신입생 때 두 번 가출을 했어요.
대학교가 너무나 힘든거에요. 어쩌면 야구를 못할 수도 있었죠.
그런데 어머니가 절 잡아 주셨어요. 지금도 어머니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죠.
감독한테 엄청 혼났어요. 지금은 작고 하셨는데 하루에 한번 씩 전화를 하셨어요.
천하의 고려대학교 최남수 감독이.. 야구계에서는 큰 산이고, 버팀목이거든요.
고려대에서 17년동안 LG 단장 양상문, 국가대표 감독 선동렬, 김경문 한화 이글스 단장 박종운 조성민 손민환 강상수 박동희 등등 이런 사람들이 다 그분의 제자예요.
매일매일 하루에 한번 씩 전화를 하신거예요.
어머니가 그 분이 뭐가 아쉬워서 너한테 매일 전화를 하겠냐? 그 때 20살 나이, 제가 그 이야기를 알아 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가방을 챙겨들고 머리를 자르고 익산 시외버스 터미널을 갔는데 그렇게 엄했던 아버지가 우리 아들 믿는다고 하시더라고요. 2003년에 돌아가셨거든요.
그게 저에게는 큰 힘이 된 거예요. 그리고 성인인 된 지금 부담이예요.
어머니 아버지 생각만 하면 제가 참 힘들어요. 어머니 나이가 86세 그런 마음을 갖고 사니까 마음이 급해요. 잘 돼야 하는데..
그래서 유소년 아이들을 지도하고 하면서도 부모의 마음으로..
야구감독의 마음은 경찰청 야구단 지도자로 갔을 때고 지금은 부모의 마음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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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학 정기전이 유명하죠?

저는 약국 가서도 연고 달라고 안 해요. 고연 달라고 해요. ㅋㅋㅋ
그런 자부심이 강해요. 정기전은 제가 4년동안 4번을 했는데 5할 순위를 가져 왔어요.
고대나 연대나 1년 농사를 정기전으로 평가를 해요. 정기 고연전을 최고로 치거든요.
70년대 80년대 그 때만 해도 어마어마 했어요. 운이 좋게 86년 87년에 이겼어요.

고참 시절 88년 올림픽때 89년에는 다 졌어요. 85 ,86년은 연세대가 정말 멤버가 좋았어요.
연세대 에이스가 조계현 고려대 선발투수가 박동의 투수였거든요.
그때는 150킬로 던지는 투수들이 몇 명 없었는데 지금은 전문 트레이닝하고 근육 발달시키고 하면 가능하기도 한데 그 때는 광속구라고 했고, 두 선수들이 맞짱을 뜨니까 대단했죠.
2학년 정기전이 기억이 나요. 87년에 연대를 11대 0으로 이긴거예요.
0이라는 숫자는 야구에서 나오기 힘든 숫자예요. 연세대가 0점을 낸거예요.
지금 프로야구 해설위원이고 SK수석코치도 지낸 김경기 선수가 그때 투런 홈런을 치면서 점수 차이가 확 벌어졌죠.
저는 개인적으로 5타수 2안타데 12장의 사진이 2루 세컨에서 홈으로 들어오면서 슬라이딩 하는 장면이 한 컷으로 찍혀 소장하고 있어요.


Q 그 후 프로 야구단에 입단했죠?

그러고 나서 89년도 4학년이 되니까 진로가 가장 큰 거예요.
1학년 때는 힘든 시간을 보냈고, 2 3 4학년이 가면서 내 포지션을 찾고 내 활동의 시간을 찾고 하면서 대학생활을 보내다 보니까 졸업이 가까 운거에요.
실업팀을 가야 하나 프로 야구단을 가야 하나 이 고민을 한거예요.
실업야구단은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농협 한국화장품 한전, 프로야구팀은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해태 빙그레 롯데 삼성 등등..
마침 전라북도에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프로 야구팀이 90년도에 창단 됐죠.
89년도 가을에 10월에 졸업을 막 앞두고 마지막 가을철 추계 연맹전을 하다 우측 발목이 베이스에 걸려서 골절이 됐어요. 심하게 다쳐서 3개월을 입원했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쌍방울에서 저를 지명했어요. 저의 야구 능력을 높게 평가 해준다는 것이 고마워서, 모든 걸 다 버리고 쌍방을 레이더스 창단 멤버로 합류하게 됐죠.


Q 야구해설가 지도자로 삶을 바꾸셨어요?

부상을 당한 후에 입단을 했거든요. 계속 후유증에 시달렸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의 기대를 져 버리게 되죠. 생각만큼 선수 생활을 오래 못하고 유니폼을 벗었죠.
그 이후에 세상이 무섭고 냉정하고 살벌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야구장을 딱 나오니까 살벌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무래도 사회인들하고 교류가 짦잖아요. 그러다보니 여러 가지가 막히고 차단이 되고..
그래서 방황의 시간이 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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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경찰청이야기로 가보죠.

야구해설위원으로 10년 정도 살았죠.
95년부터 마이크를 잡고 많은 분들이 도와줘서 비교적 빨리 사회에 적응을 했어요.
그러다 2005년도 5월 눈이 뻔쩍 뜨이는 일이 벌어졌어요.

경찰청 야구단 창단 계획.

그 당시 저를 크게 도와주신분이 계세요. 운이 좋게 경찰청 야구단 창단 지도자로 발을 디디게 됐죠.
선수를 뽑는데 300명이 온 거에요 그 중 25명을 선발하는데요.
최형우라는 선수 지금은 기아 타이거즈 100억짜리 4번 타자인데 우리 코칭 스텝 선발에서 제외가 됐어요. 그런데 제가 끝까지 추천을 했어요. 왜냐면 중학교 때부터 지켜 봤고.. 3번째 청해서 인정을 받았어요.
저보고 책임지라고.. 그래서 최형우선수가 입단을 헀죠.


Q 앞으로의 꿈은?

이제 나이가 50이 넘었어요.
정말 하고 싶은 것은 고려대 감독을 한번 하고 싶어요. 그건 정말 하고 싶어요.
10개 구단의 감독들도 후배 동료고.. 지금 추세로 가면 감독 꿈도 있어요.
그러나 저는 고대감독 하고 싶어요. 요즘 고대 야구팀이 너무 못해요. 작년에 지원 했어요.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정말 효도 한번 하고 싶어요.
그러면 야구 인생 후회도 없지만 보람으로 생각할거에요.

그리고 유소년 야구팀을 통해서.. 최형우 같은 꿈을 가지고 주말에 나와서 야구 하면서 노는 미래의 꿈나무를 발견하고 키우고..
소박하지만 이룰 수 있는 제 개인적인 바람과 목표입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전주 리틀야구단의 임기정 감독은 야구 이야기만 나오면 에너지가 넘친다.
2009년 12월 출범 당시는 처음이라 좀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어린 꿈나무를 키우는 게 너무나 좋다고 했다.
출발할 때부터 전라중학교 야구장을 쓰고 있고, 시설은 다양해서 사시사철 야구 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했다.
유소년 야구단의 목적은 유능한 선수배출이 아니고 야구를 통한 심신단련과 체험이라는 걸 많이 강조했다.
주말에 가보니 어른 야구 동호회도 전주에만 70개가 넘었다.
그가 눈물을 보이며 어머니 아버지께 야구로 효도하고 싶다고 할 때 나도 같이 울었다.
우리는 다 부모님께 아픈 손가락이니까..

그러나 또 아이들에게는 너희도 기아 타이거즈의 최형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고도 했다.
이제는 그의 꿈인 고대 감독이 돼서 다시 한번 그라운드를 누비 길 진심으로 바랜다.
85년 제 39회 황금사자기대회, KBS전주 총국에서는 동대문구장에서 직접 생중계를 할 정도로 대단한 경기였고, 그는 이 대회에서 최고 투수,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 사진 동영상 : 多陽
? : 정하루 방송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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