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이남 최초 3·1 만세운동 · 군산 ‘역사는 미래가 된다’ 이복웅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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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이남 최초
3·1 만세운동 · 군산
‘역사는 미래가 된다’
이복웅 원장
(사)군산역사문화연구원
#1.
이복웅 군산역사문화원장은 태어나서 묻힐 평생 짝사랑한 고향 군산을 이렇게 말했다.
“군산은 저항문화와 식민지 문화가 양립되고 있는데, 특히 항거문화가 더 앞서 있었고, 1919년에 3,5일 순수하게 학생과 교사 그리고 예수병원 직원 구암교회 교인들 일반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인 것은 호남 최초이자 전북의 최초이고 바로 군산에서 이뤄졌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때 공을 새운 최호장군, 의병장 임병찬장군 등의 정신이 역사적으로 묶여지면서 3,5만세 운동까지 이어지는 저항정신과 민족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근대 도시다” 라고 말했다.
#2.
떠 있는 것은
떠 있는 그대로
가라앉은 것은
가라앉은 그대로
바다 위에 햇살이 깔려 있었다.
흔들리는 것은
흔들리는 그대로
멈춘 것은
멈춘 그대로
이 세상 안팎으로
바다 위에 햇살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 이복웅 '부침' 중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그는 시집 <삐걱 거리는 바다>, <흔들리는 새> 등을 펴냈고 군산문인협회장, 전북문인협회부회장, 군산문화원장, 전북문화원연합회장 등을 지냈다.
Q 군산역사문화연구원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이곳은 군산의 향토사 그리고 군산의 문화를 함께 발굴하고 보존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군산에 잔재 돼 있는 우리 고유 전래 지명을 발굴하고 그것을 한데 묶어 내는 일을 해서 책을 발간하기도 하고, 마을의 유래에 대해서 강의도 했고, 특히 군산에 잔재 돼 있는 3,1운동 문제라든가, 특히 일제 강점기 시대의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일제식 지명을 발굴해서, 우리 전래 지명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군산이라는 짭짭한 배경, 군산이 외세로부터 침략을 받았으면서도 저항문화를 같이 공존하고 있는 아주 특이한 복합문화가 군산에 내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해서 발생하고 생성되어 왔는지 돌이켜보고 어떤 측면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
우리 후세에 내가 식민지 문화와 저항문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것은 내가 좀 해결하고 나가야겠다는 데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Q 정리가 좀 많이 됐습니까?
요즘 좀 이해가 가요.
군산이 식민지 문화를 근대문화로 승화 시켜서 근대문화의 중심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근대문화, 일제가 남겼던 문화지만 이것을 우리 문화로 다시 승격화 시키자, 다시는 이 땅에 36년 치욕의 역사가 이 땅에 도래 되지 않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교육의 역사의 현장으로 남겨줘야 겠다는 사명감으로 이 일에 뛰어 들었고,
그래서 군산은 근대 문화 중심에 서 있는 도시가 됐습니다.
Q 올해 3,1운동 100주년 어떻게 보내고 계세요?
호남에서, 한강이남에서 최초로 3.5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 바로 군산입니다.
특히 저항문화, 일제에 항거하는 문화가 군산에 상당히 내재 돼 있고, 3.5만세를 비롯해, 1920년에서 1939년 사이에 벌어졌던 소작 쟁의 140,696건 중에서 제일 크게 벌어졌던 것이 서수농민소작쟁의입니다.
일본인 농장주인 가와사키로 인해 우리 농민들의 분노, 민족적인 분노가 터트려졌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3.5만세운동, 1923년에 낙합정미소 미선공 노동파업 사건 등등 역사적으로 뛰어난 장군, 독립투사들 의병들이 군산에서 많이 배출 됐죠.
항거문화와 식민지 문화가 양립되고 있는데, 어떻게 보면 군산은 항거문화가 더 앞서 있어서, 1919년에 3.5일 순수하게 학생과 교사 그리고 예수병원 직원 구암교회 교인들 일반 시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인 것도, 호남 최초이고 전북의 최초로 군산에서 이뤄 진거라고 봅니다.
Q 그래서 한강 이남, 최초 만세운동이 일어 난건 당연하다고 보시는 거죠?
일제 36년 군산은 착취의 현장, 약탈의, 수탈의 현장 이었죠.
군산이 1899년 5월1일 개항할 당시 일본으로 수탈된 쌀의 양이 만900석이었는데, 1934년에 이 쌀은 200만석으로 돌파하죠.
군산시내 전체가 쌀로 쌓여 있었으니까요.
일본 총독이 “오 쌀의 군산”이라고 감탄사를 했는데 1935년에 군산부사에 소제목으로 올라올 만큼 군산은 바로 쌀의 도시였습니다.
목포로도 나갔지만, 강경평야, 만경평야, 강경평야 일대의 쌀이 군산으로 왔는데, 1934년 200만석 돌파기에 보면 일본으로 수탈해 가는 우리나라 쌀 전체 수탈량의 53%가 군산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나갔습니다.
Q 최초 3.1만세 운동은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1903년에 영명학교가 세워집니다.
이 3.5만세 운동이 영명학교 중심으로 됐거든요.
김병수라는 학생이 세브란스 의전으로 진학을 했죠.
3.1운동 독립선언서 33인중의 한 사람 이었던 이갑성옹이 세브란스 의전 직원 이었어요.
독립선언문 200장을 김병수 학생에게 전달을 해주고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를 한 거죠.
2월 28일 김병수 학생이 군산에 와서, 그의 선생 박연채, 이두열, 고석주, 김수영 선생 등에게 독립선언문 200장을 전달하고 군산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협의하고 김병수는 서울로 상경을 하죠.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매 그리고 다수의 태극기를 복사를 해서 3월 6일 날 시위할 것을 결의하죠.
그런데 군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낌새를 알고 습격을 해요.
현장에서 태극기 독립선언문을 압수하고, 이두열, 박연채 두 교사를 3월 4일 아침 연행을 합니다.
연행한 선생들을 구출하러 3월 4일 오후 6시에 학생, 교사 70명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와 함께 연행한 선생을 석방 하라고 구호를 외치게 되죠.
어찌 보면 이게 전라북도 최초의 만세운동 이예요.
3.5만세운동보다 하루 앞서서 이미 만세운동이 실시가 된 겁니다.
3월 6일이 서래 장날이거든요.
장날에 전국에 있는 장사꾼, 짐꾼들과 함께 시위를 하자 이렇게 애기가 됐어요.
그래서 3월 6일 할 것을 앞당겨서 3월 5일로 할 것을 결의하고 군산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겁니다.
Q 근대 역사박물관을 비롯, 근대문화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이 됐나요?
근대문화가 시작된 것은 2008-2009년도 예요.
개화기100년이 접어들면서 건축물들이 노후화되고 폐허화 되고 사람들이 떠나게 되니까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고, 청소년 비행지역으로 몰락하게 되고,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전국 지자체가 원 도심을 어떻게 할 것인가 몰입하게 되는데, 군산은 한발 앞서서 이것을 근대문화로 승화 시키자라고 하죠.
공동화 현상이 되고 폐허 화 된 여기에 이 건축물에 삶의 숨소리를 집어넣자, 죽어가는 건축물에 생명력을 부어넣자, 도시재생, 처음으로 쓴 거죠.
일제 36년 이라는 치욕의 역사가 다시 우리에게 도래 되지 않도록 후손들에게 교육의 현장으로서 남겨두자 그 교육의 현장에서 역사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고 세워 나가자는 게 근본적인 목적이었고,
두 번째는 떠난 원주민들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자 그래서 그 속에서 삶의 모습을 찾도록 하자는 두 가지 작업이 근대문화운동 이었어요.
그게 맞아 떨어져 군산이 전국에서 근대문화도시운동의 중심도시가 됐어요.
Q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겠죠?
근대문화중심도시로 나가려면 우리가 근대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설정해 나갈 것인가?
이것을 일제 잔재로만 치부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일제 잔재를 뛰어넘어서 우리 문화로 순응해서 같이 복합적으로 나갈 것인가 이런 문제는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좀 더 적극적인 근대문화로 가야 하는 길인가?
아직도 미비한 점이 남아 있는데 이 근대 문화 중심은 일제 잔재가 중심이 되는 게 아니라 일제에 저항했던 민족정신이기본이 되는 바탕위에서 근대문화로 가야만이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저항문화 군산에 펼쳐져 있는 3.1만세운동을 비롯해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 있는 토대 위에서, 근대문화 중심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고, 보충하고 보완해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죠.
Q 군산문화원장은 언제부터 하셨죠?
2002년부터 했습니다.
진포대첩재현, 임병찬장군 및 35명 의병 추모제 최호장군 추모제, 오성산 문화재, 옥구농민 항일항쟁추모식 등등 많이 했죠.
생활문화를 발굴하고 전통문화를 손쉽게 시민들이 접근 할 수 있도록 매체적인 역할을 문화원이 가지고 가자 해서, 우리 역사 탐방, 인물을 찾아서, 무인도를 비롯해서 유인도의 전설과 설화집을 내고, 군산의 지명유래을 대 집성화 해서 이 책을 4판 냈어요.
그 책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한국관, 미국 의회 도서관에도 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구비문학 그리고 특히 방치해 두었던 우리 전래 비석, 성곽, 봉수대 이런 걸 조사 발굴 연구해서 책자로 발행을 하는 등 많은 사업을 했습니다.
특히 군산은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지명이 여러 곳에 있어요.
특히 요즘에 방송 뿐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서 관심을 갖는 서수라고 하는 지명입니다.
서수면민들이 이 지명을 개정을 해야겠다고 해서 주민들 스스로가 개명을 하자고 하는 운동이 전개 됐어요.
추진위원회가 설치 되서 추진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Q 시인 이시쟎아요?
1979년도 시문학으로 데뷔를 해서. 시는 4-500편정도 썼어요.
처음 시를 쓸 때하고 지금 나이가 들어서 시를 보는 상황이 좀 달라요.
지나 와 보니까 시를 쓰는 건 절대적 이었다고 생각해요.
내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 그게 바로 시였는데 시는 생각이나 종교를 초월하거든요.
나의 모습과 시가 같이 가야하지 않겠나, 늘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시를 통해서 사회를 보고, 시를 통해서 나를 보고, 시를 통해서 다른 삶을 보고...
저는 지금껏 시가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하고 쓰죠..
시는 나의 구원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시를 통해서 생명력을 다시 한번 찾아가고, 그래서 시와 향토사를 같이 해 나가면서 나를 되돌아 보며 살겠습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군산을 저를 이렇게 기억할거예요.
그 향토사가 눕혀져 있던 곳까지 찾아가서 군산을 일으켜 세우는구나..
향토사는 나의 삶의 모습을 반추 해보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왔던가 돌아볼 수 있는 것이 향토사거든요.
그래서 이 향토사는 제게 맡겨진 절대 절명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지명, 우리 군산의 향토사를 위해서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고,
시는 나의 구원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시를 통해서 생명력을 다시 한번 찾게 되는 그런 모습이기 때문에 시와 향토사는 같이 해 나가면서 다시 한번 나를 되돌아 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군산이라는 짭짤한 배경에서 식민지 문화와 저항문화가 공존하는 군산의 정신을 잘 어우러 근대문화중심도시로 만들어 낸 도시의 향토사학자 이복웅원장의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강한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건강하셔서 더 좋은 시와, 보석 같은 군산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노익장을 과시하시길 기대한다.
? 사진 동영상 : 多陽
? 글 : 김세영 방송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