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장신대학교 간호학과 소성섭교수 : 환자중심 세상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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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법? 환자중심 세상 만들기
Nursing Law? Creating a patient-centered world
护理法?创造一个以患者为中心的世界

진정한 간호는 타인의 인생 돌보기
Real nursing is taking care of someone else's life
真正的护理是照顾别人的生活

그래서 함께 같이 살아내는거예요
So we live together
所以我们住在一起

소성섭 교수
전라북도간호협회 대외협력부
한일장신대학교 간호학과

#1.

간호법이란?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간호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

간호법 제정 필요성을 지금 주장하는 이유?
1. 보건의료의 중심은 국민이다(국민 중심)
2. 시대 상황 반영:초 교령사회, 국가감염 발생, 교육제도 개선 등이다.
3. 간호인력에 특화된 근거 법률 필요성 증대(간호인력 특화)와 다양한 전문화된 간호 정책 필요

#2.

앞으로는 저는 모든 후배들이 존경받고 존중하며
권리와 책임을 질 줄 아는 유능한 간호사가 되고
모든 국민과 지구촌 식구의 건강지킴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In the future, I will do my best to support all juniors to become competent nurses who are respected in our society, respect each other, know how to bear their rights and responsibilities, and protect the health of all citizens and members of the global village.

未来,我将竭尽全力支持所有后辈成为受社会尊重、互相尊重、懂得承担自己权利和责任的称职护士,保护所有公民和地球村成员的健康 。




Q 본인 소개를 좀 해주세요.

저는 한일 장신대 간호학과 소성섭교수입니다.

예수대학교 78학번이고 80년대 아픔을 우리도 함께 했고
1981년도에 예수병원에 졸업함과 함께 입사해서 1999년까지 예수병원의 모든 과를 섭렵하고
2000년도에 미국 간호사 자격증을 따서 미국에 가서 5년 있다가
2003년도 11월에 한국에 들어와서 남편 일을 도와주다가
2016년도에 친구의 권유로 대학원을 다니면서
2010년도에 박사학위 과정에 대학교에 교수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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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남편 분이 한때는 운동권 수배자였고 국회의원도 하셨죠?

이광철 전 의원인데 같은 교회에 다녔었고 남편은 그 당시에 운동권, 저는 80년도에 대학교에 민주화 운동과 함께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할 때 거의 이불 한 채만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시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지로 견딜 수 있었고 20년 동안 예수병원에서 일하면서 경력은 쌓였지만 간호에 대한 회의가 느껴질 즈음 후배가 시험을 봐서 미국으로 오면 참 좋겠다는 애기를 듣고 용기를 내고 미국에 가서 5년 가까이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항상 안기부 관계자분이 지키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미국에 갔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되면서 남편이 국회의원에 나오겠다 라는 메시지를 받고 한국에서 정치인의 아내는 꼭 있어야 하는 조건이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가기 전에 우리 남편이 간첩죄로 수배를 하다가 나와 있는 상황에 저에 대해 안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거리를 둬서 제가 미국을 가는 걸 더 결심 했습니다.


Q 한국과 미국의 간호사의 삶의 차이가 있다면요?

80년도 예수병원의 중환자실은 서울의 어느 병원에도 뒤지지 않는 시설이 초 현대화 돼 있는 곳이었어요.

굉장한 자부심도 있고 의사와 간호사는 서로 존중했고 저는 병원에서 실력과 인정을 받았어요.

그러나 월급은 적고 지금도 우리가 간호법에서 주장하듯이 간호사는 의사의 오더를 따르는 것에 나이가 먹으면서 회의가 느껴지더라구요.

미국에 가서 놀란 건 간호 업무에 있어서 만은 모든 것을 존중하고 내 능력을 펼치고 두각을 나타낼 때는 확실한 보상을 해주고 서로서로 타 직종에 대해 반대 의견이나 폄하도 없고 근무시간이 정확한 것 등등 처음에는 적응도 못했고 놀랐습니다.

저는 그런 것들이 우리의 권리 인줄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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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귀국 한 이후에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2004년 4월6일날 국회의원 선거가 있는데 2003년 11월1일에 왔어요.
그 때 한참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때라 새벽에 도착해서 바로 이민 가방을 방에다 놓고 그 즉시 운동 요원들이 시키는 데로 아무 생각 없이 인사하고 다녔어요.

그러다 당선이 됐어요.
남편은 바로 서울로 올라가고 그런데 저는 남편이 국회의원이 됐다고 간호사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고 정말 돈도 필요했어요.
남편이 빈털터리여서 가 버리니까 돈이 없는거예요.

차마 돈이 없다는 얘기는 못하고 제가 전문성을 그냥 묶혀 둘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 당시 예수병원 김민철 원장님이 병원에서 봉사를 하라는거예요.

미국도 갔다 왔으니까 국제 의료 협력단에 가입을 해서 해외봉사 단원으로 활동을 하라고 하셨는데 한달 후에 쓰나미가 터지면서 UN지도하에 예수병원에 의료협력단이 구성이 됐고 저는 간호사로써 다른 멤버들이랑 자카르타에 내려갔어요.

전 세계적으로 UN이 나서서 각 나라별로 특성에 맞게 일이 주어지고 뭉치는 것을 보면서 체계적이구나 싶었고 영국은 물 담당, 호주는 수술실, 우리는 외래환자돌봄 등등 내 경력이 병원이 아닌 곳에서 활동을 해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예수병원에서 갈 때마다 참석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 우리나라도 해외 재난 지역에 잘사는 국가로 봉사를 하게 되면서 코이카와 함께 군장대 있을 때부터 일을 했어요.
1년에 30개만 특별국가에서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한일장신대라는 작은 학교 간호학과가 따서 5년동안 수행하고 성공을 했어요.


Q 간호법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요 에를 들면은요?

저는 미국에서도 해왔고 노인 장기요양보험에 따른 방문간호사업을 했었는데 한국은 그때 그때 방문하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예들들어 환자들이 콧줄 영양을 하다 보면 치매환자들이 수시로 빼요.
그럼 그걸 넣는 사람은 의사거든요.

의료행위는 병원 밖에서 하면 안 돼요. 현재 의료법으로는..
아무리 보호자가 원해도 환자를 모시고 병원 응급실을 가야 하는거예요.

그래서 국민건강관리공단이나 항의하고 싸우기도 헀지만 그러나 나중에는 그만 뒀어요.
아직은 간호사가 방문 간호할 사회적 조건이 안 되는구나 했는데 이번 에 그런 문제 때문에 간호법이 필요하다는 걸 많은 분들에게 알고 알리면서 이건 정말 우리 간호사들과 학생들의 정당한 권리와 책임과 의무였구나 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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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으로도 간호법 통과를 위해 노력하셔야겠죠?

이번에 우리가 부결이 됐쟎아요 거부권이 행사 됐습니다.

간호법이 통과는 안 됐지만 저희들은 정말 이 간호법의 필요 하다는 사회적 인식을 화두로 부각시킨 효과가 컸다고 생각을 해요.

국민들이 여론 조사를 했을 떄 필요하고 간호법이 있어야 된다라고 조사를 토대로 더 알리고 궁긍해 하고 의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대한간호협회는 앞으로
간호법 제정으로 국민건강 지키겠고 클린 정치 캠페인을 통해 48만 간호사와12만 예비간호사의 힘으로 이 일을 하겠습니다.

‘1인1정당 가입을 통해60만 간호인의 힘을 모여줍쇼.’
- 1인1정당 가입하기
- 정치후원금 후원하기
- 적극적 동참하기:간호법


Q 전 세계적으로 간호법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간호사는 병원에서만 일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전 세계에 치료의 추세는 예방과 재활이 잘 이뤄지면서 아픈 사람과 병원의 수요가 적어지고 집에서 편안히 치료를 하라는 추세에요.

간호사는 의사의 지시가 없으면 소독도 못하고, 혈압이나 당뇨체크도 못하게 돼 있는데 이번 과정을 통해서 그건 일정 부분은 허락이 됐지만 우리가 환자한테 기본으로 진단이나 전문치료를 하겠다는게 아니고.

소독액 발라주고 욕창 생겼을 때 욕창치료를 체계적으로 잘 해주고 영양학적이나 신체구조상과 연관해서 좀 더 효율적으로 간호 하자는 건데 이걸 현재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문제가 대두되면서 보호자들과 노인을 돌보는 사람들이 엄청 간호법을 지지를 하게 된거예요.

60만의 간호사와 12만명의 간호 신입생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환자나 노인 과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있다는 거죠.

환자가 우리의 중심이지 의사 중심은 아니잖아요.
환자 중심을 놓고 의사 간호사 임상병리사 같이 고민하면 이 문제 아무것도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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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간호사를 시작으로 간호학과 교수가 되기 까지 많은 노력을 하셨죠?

그 당시 간호사의 꽃은 중환자실이고 간호사를 정말 오래 하고 싶으면 중환자실을 해야한다라는 선배의 애기를 듣고 시작했는데 정말 중환자실 간호사는 특별하게 교육을 많이 시켜요.
그러면서 중환자실 간호사로 인정을 받았어요.
그리고 미국에서도 일을 너무 잘하니까 인정을 받았죠.

직장에서의 그런 인정이 남편이 그때도 간첩으로 수배 중이어서 매번 도망 다니지 감옥도 갔다 오지 사회활동 한다고 맨날 거리로 나갔는데 그런 것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에 몰입을 했고 충실히 하다 보니까 저 나름대로 인생길 하나하나가 쌓아져 가는 단계가 됐더라구요.
나 개인으로 간호사로써 정말 열심히 악착같이 살았던 게 그리고 어떻게 보면 남편 때문에 살 수 있는 방법은 그 길이어서 열심히 살았고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교수자리에 앉아 있더라구요.


Q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고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죠?

저는 우리 학생들한테 그걸 알려주고 싶어요.
지난 해 내가 아퍼서 교수를 그만 둘까도 생각 했지만 이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간호라는 것이 취업이 잘 돼서 인기도 있지만 진짜 삶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고 우리 인생 목표가 돌봄이 되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학자가 “어려운 상황에서 함께 문제를 풀어가서 해결 됐을 때 나는 행복이다”라고 했듯이 간호사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꼐 정말 열심히 돌보고 노력하면서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경험하고 성취함으로써 나의 가치와 나의 삶에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면서 어렵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에 나의 행복과 성공 그리고 목표가 뭔가를 붙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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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를 마치고

젊은 날 소성섭교수를 보면서 김현승 시인의 ‘견고한 고독’을 생각했다.
뜨거운 물 한 모금도 넘길 수 없게 마르고 힘들어 보였지만 맑은 눈동자와 이겨내야 한다는 강인한 의지로 뭉친 그는
시인 표현 그대로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의 젊은 투사의 참 고운 아내였다.

이번에 우연히 보게 된 남편 이광철 전 의원의 옥중편지는

‘사랑하는 나의 님이여...
그리고 교도소 안의 코스모스를 말려서 편지에 부치니..
지금은 이것밖에..
그리고 건강하기를...’

한 남자의 절절한 사랑이 있어서 그 지독한 암흑같은 시간을 보냈고, 세상이 변하면서 정치가의 아내로 교수로 당당하게 살지 않았을까 싶었다.

소성섭교수는 현재 예수병원 국제의료협력단 회원, 전라북도 치매센터 이사, 전라북도광역 정신건강센터 ‘마음소통’운영위원. ICN Conference and CNR 2015 Seoul 조직위원으로도 일한다.

타인의 인생을 돌보며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내자는 소성섭교수의 신앙이 한알의 밀알이 되고 빠른 시간 안에 간호법 제정이 돼서 60만 간호인 모두가 우리의 국민의 건강 지킴이가 됐음 좋겠다


사진 동영상__유기승
글__정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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